편집자주 | 이화에는 故 이어령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수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어령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이어령 선생의 제자부터 동료까지, 7명의 취재원에게 이어령 선생에 대한 기억을 들어봤다. 

 

보기보다 여리셨던 지도교수님

2001년 9월 석좌교수 고별강연회에서 이어령 선생과 김현자 교수(오른쪽). 제공=본인
2001년 9월 석좌교수 고별강연회에서 이어령 선생과 김현자 교수(오른쪽). 제공=본인

이어령 선생님이 지도 교수실 때 박사 학위를 받은 첫 번째 제자가 접니다. 교수로 임용되고서는 동료로서 선생님하고 30년 정도 함께 했죠. 평생을 가까이 있었던 인연입니다. 

선생님의 다른 업적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이화에서의 학문적 업적은 가려진 측면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공을 들인 흔적은 여직 이화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구조주의, 기호학, 페미니즘, 현상학 등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문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신 선구자십니다. 그게 선생님의 제자인 저희의 논문을 통해 나아가면서 각 대학과 한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결국 저희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끔 이끌어주신 건 이어령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논리적으로 밀어붙이실 때와는 달리 따뜻한 심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논문 심사가 있던 때, 논문을 엉성하게 써온 학생을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논문이 지닌 약점을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게 지적하셨죠. 그런데 그날 밤에 저한테 전화를 거셔서는, ‘내가 아까 너무 호되게 굴어서 얼마나 상처받았겠냐’, ‘내가 논문에만 몰두한 나머지 너무 심했다, 잠이 안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면이 있으셨죠. 또 한 번은 국문과 인기투표에서 서너 번 연속으로 1등 하시다가 2등으로 떨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눈에 띄게 낙담하셨어요. 안 그런 척하셔도 학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신 거죠. 

선생님은 교수 협의회에서의 강연부터 기숙사 ‘한우리집’ 명칭을 지어주시는 것까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이화의 크고 작은 수많은 부분에도 기여를 많이 하셨어요.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이화의 신입생들은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고, 그해 처음 내리는 눈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죠. 선생님은 이화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김현자(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국어국문학과 학풍의 기틀을 놓다

                                                 정끝별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공=본인
                                                 정끝별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공=본인

이어령 선생님 강의는 서광선, 진덕규 선생님 강의와 함께 1980년대 이화의 3대 명강의 중 하나였어요. 1980년대 리얼리즘 문학 속에서 현상학, 신비평, 러시아형식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등 첨예한 외국 문학 이론을 가장 먼저 소개하시고 실제 작품을 통해 분석해 주셨죠. 그 해석과 분석은 정교하면서 창의적이었고,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시선이었어요. 본교 국어국문학과 학풍의 미덕 중 하나가 정치한 텍스트 읽기, 텍스트 분석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학풍의 기틀을 이어령 선생님께서 놓으신 거죠. 특히 대학원 수업의 경우 외부 대학생들도 많아서 학부 수업처럼 늘 50명이 족히 넘게 듣곤 했어요. 

선생님 강의는 말씀도 빠르고, 동·서양, 고전·현대를 종횡무진 넘나들어서 전부 필기하는 것은 저로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부터는 필기를 포기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들만 선별해서 필기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필기를 곱씹으며 제 생각들을 적어두기도 했고요. 제 동기 중에 국문과 수석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강의 노트에는 선생님의 농담까지도 모두 적혀 있었어요. 시험 때 그 친구 강의 노트를 복사해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행운아였죠. 라캉의 처럼 강의록 자체가 저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의 강의 노트를 보며 알게 됐어요. 특히 대학원 강의는 그 자체가 저서였고, 실제로 저서로 출간되기도 했고요. 이어령 선생님은 이화가 한결같이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던 분이셨어요. 

1일 오전에 선생님 문상을 다녀왔는데요, 국화를 올리면서 이런 문장들을 마음에 품었어요. “선생님의 글들을 천천히 다시 읽겠습니다.” 선생님 자체로 너무 화려하셨기에 오히려 가려졌던 그분의 글들이 얼마나 앞섰던 것인지 이제부터 증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끝별(국어국문학과 교수)

 

타우마제인을 열어주신 스승

2019년 11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라스트 인터뷰집을 제안하던 날 김지수 기자와 이어령 선생(오른쪽). 제공=본인
2019년 11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라스트 인터뷰집을 제안하던 날 김지수 기자와 이어령 선생(오른쪽). 제공=본인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이어령 선생님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셨어요. 당시에는 너무나 크고 유명한 분이라 감히 뵐 엄두를 내지 못했죠. 이어령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역시나 인터뷰가 계기가 돼서였습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인터뷰 시리즈로 당대의 지식인과 유명인을 통찰해 오던 차에 2016년 1월, ‘문명 선동가 이어령 “지의 최전선으로 돌격하라”’는 타이틀로 밀도 높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암 발병 이후, 2019년 가을에는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를 통해 선생님을 한 번 더 만나 뵀어요. 당시 사회적 반향이 대단했고, 선생님은 제게 ‘라스트 인터뷰’를 책으로 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렇게 2020년 가을부터 2021년 초여름까지 뵙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선생님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섞으셨어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병약하고 작아진 몸으로 과연 말씀하실 수 있을까’ 염려했으나, 2~3시간의 ‘다이얼로그 공연’이 끝나면 항상 제가 더 지쳐있곤 했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과일이나 홍삼 초콜릿을 챙겨주셨죠.

저는 인생에서 한 번도 이런 분을 본 적이 없어요. 그를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그 인터뷰를 기사로 쓰는 동안에도 내내 홀린 듯 황홀했어요. 끝없는 ◆타우마제인을 열어주신 그분이, 제 스승인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김지수(사회·94년졸·조선비즈 기자) 

 

상상력과 창작력에 사로잡힌 엄청난 자유인

장 상 제11대 총장. 출처=이대학보 DB
장 상 제11대 총장. 출처=이대학보 DB

선생님은 이화를 정말 사랑하셨어요, 이화가 요청하는 것은 다 해주실 정도로. 아주 성실하고, 뛰어나고, 제자를 사랑하는 교수였어요. 탁월한 창조적 사고를 가져 행정에도 일가견이 있으셨죠.

1999년 정부가 ‘새천년준비위원회’를 열었을 적에 이어령 선생님과 함께 일했어요. 그분의 생각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본인 생각에 몰입돼 있으면 다른 사람 얘기를 잘 듣지 못했어요. 지혜와 지식과 창조적 정신이 넘치다 보니 끊임없이 얘기가 나왔죠. 자신의 상상력과 창작력에 사로잡힌 엄청난 자유인이셨어요. 

제가 그분의 딸 ◆이민아(1959~2012)를 가르쳤어요. 참 똑똑하셨는데 일찍 갔죠. 따님이 가고 난 뒤에 이어령 선생님이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셨는데, 지극히 지성적인 존재가 신앙인의 세계로 들어오는 그 과정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장 상(제11대 총장) 

 

한민족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다

최재천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출처=이대학보 DB
최재천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출처=이대학보 DB

선생님과 2019년 2월 ‘조선일보 100년 포럼’에서 대담했을 당시, 제게 해 주신 말씀 중에 마음에 남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 키워드가 바로 ‘광화(光化)’입니다. 광화문 할 때 쓰이는 ‘빛 광’자에 ‘될 화’자요. 그 키워드를 주시면서 ‘왜 광화문이라 부르는 줄 아느냐’ 물으셨어요. 그러면서 ‘광화라는 건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뜻이다, 광화문에서 우리는 촛불 집회도 했고 알파고와 바둑도 뒀다’며 말씀을 이어나가셨죠. 이어령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그 사건은 ‘AI 시대를 여는 굴렁쇠’예요. AI 시대의 도래를 세계에 알린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는 거죠. 이어령 선생님은 이런 상징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광화문에서 이뤄지는 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세계를 밝게 만들라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결국 홍익인간 개념하고도 이어지는 것이죠.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2021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 축사로 졸업생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광화’를 마음속에 담고 준비한 말이었어요. 

“이 위대한 대학을 졸업하는 여러분은 평범하게 살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바깥에 있는 78억 세계인이면 평범하게 살아도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위대한 대학의 위대한 선배님 뒤를 따라 평범하게 살면 안 됩니다. 항상 거룩하게 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최재천(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이화에 아낌없는 조언을 주다

이종선 전(前) 기획처 홍보차장. 제공=본교 출판문화원
이종선 전(前) 기획처 홍보차장. 제공=본교 출판문화원

이어령 선생님은 물론 전공 학문인 문학 강의를 주로 하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본교의 현안에도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하고는 제가 홍보실에 있을 적에 딱 한 번 인연이 닿았습니다. 1997년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구상할 때 선생님을 자문위원으로 모셨어요. 그때 학술대회, 음악회 등 여러 사업을 준비하며 고견을 많이 들었죠. 그때 선생님이 이화의 가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이화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화가 새천년을 맞이할 때도 많은 조언을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새천년이라는 화두를 가장 먼저 던지신 분도 이어령 선생님이셨죠. 역대 총장이나 학교 본부에서도 선생님의 세계적인 안목을 많이 활용했다고 알고 있어요. -이종선(전(前) 기획처 홍보차장) 

 

나다운 삶을 강조하다

                                                  김민희 톱클래스 편집장. 제공=본인
                                                  김민희 톱클래스 편집장. 제공=본인

이어령 선생님은 ‘나’다운 삶을 강조하셨던 분입니다. 78억 지구인 중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저마다의 별로 빛나길 바라셨어요. 360명이 한 방향으로 뛰면 1등부터 꼴찌까지 순서가 정해지지만,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요.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순간이 기억납니다. 링겔로 영양제를 투여받으며 연명 중이시라 아주 많이 야윈 상태셨어요. 놀라고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하시며 힘겹게 말을 이으셨습니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본인을 타자화해서 의식의 얇은 막을 오가는 스스로를 관찰하셨어요. 추상적 죽음이 아닌, 물리적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직시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은 인간다운 품위와 의연함을 지키셨습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뵀을 때 큰절을 드리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요. 그날 몇 번을 뒤돌아보면서 “선생님, 꼭 다시 올게요”라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큰절을 올리고 싶어요. 

선생님! 저에게, 이화인에게, 동시대인에게, 더 나아가 후대에 위대한 유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민희(국문·99년졸·톱클래스 편집장) 

 

◆타우마제인(thaumazein): 깨달았을 때의 환희

◆이민아(1959~2012): 이어령 선생님의 딸. 1959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1981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졸업하고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친 뒤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활동했다. 1992년 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왕성한 신앙 활동을 하다 2009년 목사가 됐다. 위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2012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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