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 카페테리아에 설치된 칠판에 필기를 하며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 학생들 허해인 기자 heohaein@ewhain.net

 

대학이 기초 학문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교육계에서 나오고 있다. 올해 열린 ‘서울 포럼 2019’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 주요 대학 총장들은 현대 사회에 부응하기 위한 대학의 최우선 과제로 ‘기본의 회복’을 꼽았다. 응용 과학과 실용 학문으로 인한 성장에는 한계가 있으니 기초 학문 교육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교는 아직 기초 학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 보인다. 호크마교양대학이 발표한 2020년 교양 교육과정 개편안에 따르면 교양 과목 필수 이수 학점이 대폭 줄었다. 전반적인 기초 학문 교육을 담당하는 교양 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대학이 취업난에 대응하기 위해 실용 학문 교육을 늘리고 순수학문 교육을 줄이는 대학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고 전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신기하게도 고전을 이용한 교양 교육을 꿋꿋이 고집하는 학교가 있다. 바로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다. 약 80년간 고전으로만 수업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이곳을 ‘미국 최고의 학사 과정’을 가진 대학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학교인 세인트 존스 칼리지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 중 하나다. 이는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대학 형태다. 대규모 강의식 수업을 하는 연구 중심 대학이 아닌 소규모 토론식 수업을 지향하는 학부 교육 중심 대학이다. 이런 특성으로 세인트 존스 칼리지는 아나폴리스 캠퍼스와 산타페 캠퍼스를 합쳐 전교생이 약 800명이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는 1937년 고전 200권을 읽는 학사 제도를 도입해 모든 학생이 세부 전공이나 선택 과목 없이 4년간 같은 교육 과정을 밟는다. 졸업하면 모두 인문교양학사를 받게 된다. 수업은 튜토리얼이라고 불리는 일반 수업과 세미나로 나뉜다. 튜토리얼은 수학, 과학, 외국어(그리스어, 프랑스어), 음악 수업이며 세미나는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인문 고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의 고전 원문을 읽고 토론한다. 인문학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수학, 과학 시간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와 같은 고전을 다룬다. 자연 과학 수업 때는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실험을 교내 실험실에서 재현해본다.

그래픽=김보영 기자 b_young@ewhain.net
그래픽=김보영 기자 b_young@ewhain.net

학교가 제공하는 독특한 커리큘럼에 끌려 세계 각국에서 학생들이 찾아와 현재 48개국의 학생이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니고 있다. 2년째 재학 중인 정소현씨는 국내 대학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LG기업에서 일하다 이 학교에 왔다. 강의식 한국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배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면 다들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현실에서는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 간극을 인정하지 못해서 이 곳에 왔어요.”

한국에서 정규 교육만 받고 자란 정씨에게 이곳의 수업은 새로웠다. 문제 풀이를 위해 구체적 조건들을 제시하는 한국과 달리 심연에서부터 답을 생각해야 하는 추상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었다.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편에서 학자들이 ‘시’에 대해 이야기해요. 고전이 보통 그렇듯 의견을 명확하지 않게 돌려 말하더라고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밝히는 에세이를 썼어요. 답을 찾는 구체적 질문에만 익숙해 있다가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니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게 느껴졌어요.”

전공 없이 전부 교양 수업으로 이뤄진다면 그 배움의 깊이가 얕지는 않을까. 3학년 박시은씨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모든 과목 수업이 기초부터 심화과정까지 4년간 각각의 커리큘럼을 따르기 때문이다. 세미나의 경우 1학년 그리스 문학 작품으로 시작해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 순으로 공부하게 된다. 수학, 과학,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박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서 아는데, 한국 교양 수업과는 다르다”며 “교양 과목을 얕게 배운다기보다는 학부생 수준으로 많은 전공을 배우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선택 없이 모든 과목을 수강하는 것처럼 교수도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박사학위를 받은 분야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교수의 전문성에는 문제가 없냐는 질문에 3학년 마리오(Mario)씨는 “오히려 더 좋다”고 말했다. “제 작년 2학년 수학 수업 교수는 철학자 헤겔(Hegel)을 전문 분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어요. 뉴턴의 원심력 역학을 개체를 유지하려는 성질인 헤겔의 개체성과 보편성으로 바꿔 질문하시더라고요. 지식은 한 영역에 갇혀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죠.”

‘삶에는 전공이 없다’는 슬로건처럼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교육 목표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서로 존중하는 대화가 부족한 현대 사회에서 소통하는 힘도 키워주고자 한다. “요즘 대학들은 학생이 직업을 갖도록 교육하는 일에 몰두해요. 예를 들어 뉴 멕시코 대학은 뉴 멕시코의 의사, 변호사, 회계사를 키우는 게 목표죠. 하지만 우리는 학생들이 다방면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입학처 아드리안 월렌(Adrian Wallen) 차장이 말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 졸업생의 약 70%는 대학원에 진학한다. 졸업 후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수는 미국 전체 대학 상위 2%다. 약 10%는 로스쿨에 진입한다. 바로 취업 시장에 들어가는 학생의 수가 현저히 적은 것이다. 월렌 차장은 “대학원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며 “졸업생들이 4년간 고전을 치열하게 분석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연구 활동에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예상했다. 4학년에 진학하는 김민석씨는 “철학 관련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전문 분야를 만들기 위해 졸업하면 대부분 대학원에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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