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7일 수학 튜토리얼 수업에서 한 학생이 「알마게스트」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김수현 기자 rlatngus9809@ewhain.net

 

교실을 가득 차지하는 큰 직사각형 책상과 사방에 붙은 검은 칠판. 열 다섯명 정도의 학생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9월16일 미국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 산타페 캠퍼스의 3학년 세미나 수업, 파스칼의 「팡세」를 공부하는 날이었다.

수업은 교수가 「팡세」의 한 문단을 낭독하면서 시작됐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개념은 믿기 힘들지만, 믿지 않으면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교수는 학생들에게 파스칼의 주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학생들은 책의 434번째 단락 ‘이성을 통한 이해가 아닌 이성, 합리성에 굴복해 신을 믿게 된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통해 파스칼이 말한 이성의 의미를 추론했다. 이후 학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성의 한계와 그 역할에 대해 토론했다. 자연스럽게 파스칼이 말한 ‘자선’의 의미를 분석하며 감성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의견을 제시할 때는 자신이 참고한 내용이 담긴 문단 번호를 말했다. 교실 내 모든 발언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교수가 몸, 이성, 감성의 작동 방식을 질문해 인간의 도덕성은 이성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감성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침묵이 단 1분도 존재하지 않았던 뜨거운 토론이었지만 학생들은 이런 상황이 자연스러운 듯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9월17일 천문학 고전 「알마게스트」를 다룬 2학년 수학 튜토리얼 수업도 유사한 모습이었다. 한 남학생이 책의 논리가 이상하다며 질문을 던지자 나머지 학생들은 답을 찾기 위해 일제히 머리를 맞댔다. 몇 분간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교실을 채우더니 이내 한 명이 칠판 앞으로 가 행성이 자전하는 모양을 그리며 설명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학생이 벌떡 일어나 분필로 그 전 학생의 그림을 수정하며 반박했다.

질문 하나를 두고 모두가 고군분투하던 중 질문한 학생이 마침내 “이제 좀 알 거 같기도 하다”며 자기가 이해한 바를 설명했다. 그 학생이 올바르게 알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연스레 교수를 쳐다봤다. 교수의 반응을 살피는 사람은 기자 하나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다시 자기들끼리 몰두하기 시작했다. 수업 내내 말하지 않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교수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팔짱낀 채 지켜보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보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등 한 마디씩 거들 뿐이었다. 질문을 던지고 함께 답을 찾아가기. 의견을 말할 때는 고전 안의 내용으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기. 그게 수업의 전부였다.

“고전이 확실한 답을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우리만의 논리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익숙해졌죠. 답이 없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요? 무엇이 잡힐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같이 고민해보는 거예요.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길을 찾더라고요.” 4년째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니고 있는 권혁희씨가 말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수업은 강의가 아닌 대화로 진행된다. 정해진 답을 찾는 시험도, 이에 따른 학점도 없다. 수업 참여도와 스스로 책을 선택해 원하는 주제로 작성한 세미나 페이퍼만이 평가 대상이다. 세미나 페이퍼란 학생이 고전과 주제를 직접 선택해 작성하는 에세이다. 1~3학년은 한 주제 당 8~10장, 4학년은 졸업 논문으로 30~40장의 글을 쓴다. 곧 3학년에 올라가는 오은서씨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선정해 페이퍼를 썼다. 로마인이 스스로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고 판단한 이유와 정치적 자유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는 글이었다.

수업 특성상 학교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한다. 일례로 학생들은 교수를 교수(professor)가 아닌 튜터(tutor)라고 부른다. 교수(professor)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수 머릿속에 있는 답을 맞히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면 자유로운 의견 교환은 불가능해진다. 학생들이 서로를 부를 때는 이름 대신 미스(Ms), 미스터(Mr)로 존칭한다. 교수를 대하는 태도와 차이를 두지 않음으로써 교실 안에 있는 모두가 평등하게 대화하기 위해서다.

또한 ‘돈 래그(Don rag) 시스템’ 평가 방식을 통해 수업 참여를 독려한다. 철학, 과학, 수학, 음악 등 교수가 모두 모여 학생 한 명씩 수업 참여도와 제출한 페이퍼를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수업에서 말이 없는 학생은 스페셜 돈 래그를 통해 교장과 면담한다. 태도가 나아지지 않는 학생은 퇴학당하기도 한다.

2학년을 끝낸 박시은씨는 돈 래그 때 교수들로부터 좀 더 말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그는 항상 공부했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럴바에는 잠이나 더 잘 걸’ 후회할 정도였다. “앞으로 더 준비하겠다고 했더니 이제 준비는 그만하라고 하더라고요. 대신 공부하면서 느꼈던 혼란과 의문들,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수업 시간에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어요.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같이 고민하자면서요.” 권씨는 “한국에서는 할 말이 있으면 똑똑하고 도움이 되는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거르는 거 같다”며 “여기는 제대로 몰라도 그냥 질러보는 문화”라고 덧붙였다.

세미나 수업에서는 교수가 토론을 여는 질문을 준비한다. 해당 고전에서 일반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교수의 뜻대로 질문이 선정된다. 전쟁과 운명을 이야기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수업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웃었다는 내용의 문단들을 읽고, 그 웃음의 의미를 분석하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런 수업 방식으로 인해 학생들은 책 속 사소한 의미도 놓치지 않게 됐다.

“전에는 책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제가 사소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토론의 주제인거예요. 교수님이 ‘신기하지 않니? 재밌지 않니?’ 하시는데 처음에는 ‘아이고 호기심도 많으시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따라서 공부하다 보니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더라고요. 사소하게 느껴지는 문제들에도 집중하는 습관을 길렀어요.” 박씨가 말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 1등만 성공하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올 라운더(all rounder)’ 양성을 꿈꾸며 교양 교육만 하는 학교. 기업에서 쓸 수 있는 실용 지식을 배우라는 대학시장에서 고전만 고집하는 학교.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거냐는 비판도 종종 받지만 2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는 방승윤씨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수업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공부하는 게 그냥 재밌어요. 취업이나 사회에서의 경쟁력 생각할 것도 없이요. 책상에 앉아서 내 생각을 까놓고 이야기할 때 틀리는 경우도 많고 부끄럽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단련이 됐어요.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관대해졌고요.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공동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됐어요. 책읽고 같이 하나의 아이디어로 도달하는 일이 제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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