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KCL 조문경 동문, 뉴욕 반주 박영숙 동문

  1980년대, 1990년대. 여성취업 자체에 의문이 있던 시절이다. 당시 취업한 여성들은 결혼 후 비정규직이 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게 당연했다. 출산휴직, 육아휴직, 데이케어 센터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여기, 악조건 속에서도 취업의 문을 두드렸던 동문들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가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개척한 그들은 외부인 신분이라는 장애물을 하나 더 짊어지고도  낯선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험난했던 정착 과정을 8월13일~28일 이대학보, 이화보이스, EUBS가 공동 취재했다.

 

“9년간 라디오 진행하며 이민법 변호사로 입지 다졌죠”

미국 거주하는 한인 위해 이민법에 집중, 추방위기 놓인 가족 구제하기도

▲ 법무법인 KCL 소속 조문경 변호사. 제공=EUBS

  조문경(영문·86년졸) 변호사는 법무법인 KCL(KIM, CHO&LIM, LLC)의 설립자다. 그가 걸어온 길은 일반적인 법조인들과는 달랐다. 본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다 회계사가 됐고, 이후 법에 흥미를 느껴 미국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다. 그 과정이 힘들진 않았을까. 8월20일 조 씨를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나 그의 고군분투기를 들어봤다.

  조씨는 약 10년간 회계사로 일했다. 회사에서 이사직까지 올라 30대 여성 이사로 주목받던 그가 사표를 낸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다. 사실 그는 3년 전부터 유학 갈 준비를 했었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둘 때 매니저가 제 용기를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 내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지금보다 큰일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죠.”

  대학을 졸업 후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던 그는 직장을 다니며 번 돈을 모아 뉴욕대(New York University)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 전까지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을 타고 출장을 다니고, 40명의 부하 직원이 있던 그가 조그만 기숙사 방에서 법 공부를 시작했다. 조 변호사는 그곳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불이 꺼지는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로스쿨 졸업 후 이력서를 100군데 이상 냈다. 합격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름 회계사로 일한 경력도 길고 로스쿨도 졸업 했으니 일자리를 빨리 얻을 수 있을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곳도 그를 채용하지 않았다. 수많은 좌절을 경험한 끝에 그는 겨우 중소규모의 로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씨는 전략적으로 이민법 분야를 자신의 전문 분야로 택했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을 겨냥한 분야 선택이었다. 그는 로스쿨에서 세금을 전공하다시피 공부했지만 미국인을 대상으로 미국인들과 경쟁하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니던 회사를 나와 KCL을 만들었을 때도 고민은 여전히 많았다. 10년 동안 회사는 약 20명의 직원을 가진 규모로 성장했지만 초기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한 방안을 스스로 찾아야했다. 조 변호사는 전략적으로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9년간 방송을 진행했다. 그가 운영했던 코너는 ‘조변의 꽃보다 이민법’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며 법에 대해 이야기뿐 아니라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상담도 해주며 이민법 변호사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나를 알리기 위한 홍보를 많이 했어요. 그 중 하나가 매주 생방송으로 이민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죠. 법 이야기만 하면 딱딱하니 생생하게 라디오를 진행할 수 있도록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거나 상담을 진행했어요. 생방송이라 실수할 때도 있었죠.”

한국에 사는 사람에게 이민법은 그다지 필요 없는 분야다. 그러나 미국에 정착하려는 혹은 추방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다르다. 조 변호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희귀병에 걸린 아들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무작정 미국에 왔던 가족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 가족은 급하게 미국에 오느라 비자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었다. 추방 위기에 놓인 그들을 조 변호사가 추방 심판에서 구제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법조계 직업은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회계사 시험을 쳤을 때도 4가지 영역 중 그가 가장 취약했던 영역이 법이었다. 그는 모든 영역 75점 이상이어야 통과할 수 있는 AICPA(미국 회계사 시험)에서 75점을 맞아 법 영역을 간신히 통과했다. 반면 자신 있었던 회계 분야는 98점이었다.

  하지만 조 변호사가 몸담았던 회사가 다른 회사와 인수합병되며 만났던 로펌 관계자들은 그가 갖고 있던 법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이는 후에 그가 로스쿨을 선택할 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스쿨에 진학하니 법 공부가 저와 딱 맞았어요.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잘했기 때문이죠. 나한테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데 그건 당장 알 수 있는게 아니에요. 내가 바라는 것을 찾아가면서 어떤 것을 잘하는지 알 기회가 생기죠.”

  그는 열정, 계획, 노력을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요소로 꼽았다.

  “첫째는 어떤 것을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어야 하죠. 저는 항상 제가 필요해서 시작했어요. 그 후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할 계획을 짜야하고 계획이 서면 노력해야 해요. 저는 10년, 20년 후 제가 어떤 모습일지 자주 상상해요. 어떤 사람이 돼있을까 그림을 그리죠.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해요. 그러나 그 운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거예요.”

 

모두가 안된다고 한 JFK공항 입점, 결국 성공했어요”

혼자만의 성공은 진정한 성공 아니야, 앞으로는 한인 커뮤니티 발전 위해 노력할 예정

▲ 박영숙 동문과 반주 정주호 사장. 제공=EUBS

  미국 뉴욕(New York) 유니언스퀘어 공원(Union Square park)를 마주보고 있는 곳, 풍요를 상징하는 보름달이 걸려있는 가게가 있다. 저녁 때면 한국 음식을 맛보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이곳은 한국음식 전문점 반주(barn joo)다. 반주에서 박영숙(경영·86년졸) 동문, 정주호 사장을 8월16일 만나 험난했던 뉴욕 정착 과정에 대해 들었다.

  “낮에는 프랜차이즈 정육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일을 거들었어요.”

  정 사장과 박 동문은 부부다. 둘은 한국에서 만났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정 사장이 먼저 뉴욕에 와 기반을 다지려 했었다. 그러나 부푼 꿈만을 안고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도착한 한국인이 마주친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영어도 능숙하지 않고 미국 실정도 잘 모르는 정 사장은 처음 도매상에 취직해 하루 12시간 씩 짐을 나르기도 했다.

  박 동문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에 어학연수를 와 있었다. 연수 중이던 그는 뉴욕에 정 사장을 만나러 왔다가 그대로 미국에서 함께 가정을 꾸렸다. 둘은 함께 공항 휴대전화 대리점, 면세점, 정육점 등을 운영하며 뉴욕에서 고군분투 했다.

정 사장은 존F케네디 국제공항(JFK 공항)에 휴대전화 대리점을 입점시키기 위해 아침마다 커피를 사 들고 공항 입점 담당자를 쫓아다녔다.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사정한 지 2주일 쯤 담당자는 잠깐만 시간을 주겠다며 정 사장과 대면했다. 담당자는 해외에서 휴대전화가 없어 불편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 여행객들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준다는 그의 계획에 공감했다. 박 동문 부부는 그렇게 공항에 휴대전화 대리점을 연 뒤에야 뉴욕에서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부는 간절하게 찾으면 길이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아시안이고 미국에서의 영업 경험도 적은데 어떻게 공항에 들어갈 수 있겠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만났던 사람들이 다 입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했었는데 결국 해냈어요. 이후 기념품이나 옷 등을 파는 면세점을 추가로 열기도 하고 퍼스트 클래스에 기내식 재료를 납품하기도 하면서 여러 사업으로 넓혀 나갔죠.”

반주는 2013년 봄 맨해튼(Manhattan) 한복판인 플랫아이언 거리(Flatiron District)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한국 음식점은 한인 타운에 밀집해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인들이 쉽게 한국 음식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장사가 잘 돼 유니언스퀘어 공원 부근으로 자리를 옮긴 반주는 택시를 타고 반주에 가자고 해도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반주는 ‘식사에 곁들이는 술’이라는 뜻과 ‘먹을 때 뒤에 흐르는 음악’이라는 뜻이 있다. 박 동문 부부가 친구들과 밥을 먹다 ‘반주나 한잔 하자’며 거론된 반주는 한국 발음과 비슷한 영어 ‘barn(헛간)’을 사용한다. 가게 내부는 헛간처럼 어두운 나무 벽으로 이뤄져 있고, 밧줄 등을 이용해 헛간처럼 꾸몄다. 메뉴도 치킨, 소주를 섞은 칵테일, 시그니처 메뉴인 비빔밥, 김치전 등 한국적이다.

▲ 반주 내부. 제공=EUBS

  “사업을 할 때는 어려운 것, 모르는 것을 하면 안돼요. 처음 반주를 시작할 때도 치킨을 먼저 생각했었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면서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거부감이 없는 음식을 메뉴로 정했어요.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식을 선정한 거예요.”

부부는 이제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한다. 박 동문은 현재 한인 예술인들을 키워주는 R재단에서 어린 예술인들을 후원하고 있다. 가능성이 보이는 신예 작가들을 발굴해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박씨는 본교 동창회 뉴욕지부 회장도 맡고 있다.

“어렸을 때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나만 성공하는 게 성공이 아니에요.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 잘 돼야 해요. 이후 미국에 와서 정착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좀 더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해 기반을 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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