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통역 활동가 김희재(정외·07)씨

“통역? 사람 알아가는 재미죠”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본어 통역 활동을 해왔던 김희재(정외·07)씨.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술술 말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의 경험담도 재치 있게 술술 풀어냈다.

그는 성장 배경부터 특별하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가족과 함께 일본 도쿄 나고야로 간 김씨는 5살까지 일본에서 살았다.5년 후 그는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 5학년까지 한국에서 지내다 다시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됐다. “일본에 다시 갔을 때 일본어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당황했어요” 일본어를 다시 익히기 위해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자를 한 글자에 200번씩 썼다는 그는 엄청난 두께의 연습장이 쌓였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두께가 한 손 두 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가 통역이라는 일에 발을 담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자원봉사활동부터다. 명예통역안내사로서 한국에 운동 경기를 보러온 일본인들을 수행 통역하는 일이었다. “사실 통역이라는 직업 자체가 맘에 들었던 건 아니고 단지 일본어를 또 다시 잊고 싶지 않아서 시작했어요”

2007년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김씨는 본격적으로 통역 일을 하게 됐다. 여름방학 때 그는 일본 여배우인 ‘다카기 리나’가 한국에 3일 정도 머무르는 동안 수행 통역을 맡았다.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3일 꼬박 따라다녔어요. 이 계기로 배우 김명민씨와도 알게 됐죠” 여배우를 수행 통역했던 경험은 긴장을 늦출 수 없어 가장 힘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해 7월∼8월에는 매년 개최되는 ‘한인학생회의’에 김씨가 통역자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회의는 한일관계·역사문제·성범죄 등 한국과 일본의 공통 관심사를 주제로 한일학생들이 서로 토의하는 자리였다. “3시간 회의하고 10분 쉬고…만만한 회의가 아니었어요” 그가 통역을 맡게 된 팀은 ‘강간’을 주제로 토의하는 팀이었다. 그가 이때 가장 힘들었던 일은 통역이 아니었다. “회의가 너무 활발하게 진행 돼, 12장 분량인 보고서가 38장이나 됐어요” 그는 “통역자를 사랑하면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예의라는데…전 학생들에게 미움 받았나봐요”라며 애교 섞인 볼멘소리를 냈다.

작년 11월에는 한·일 간 회의를 갖기 전 시찰단으로 온 일본 장관 등 주요직 인사들을 수행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인천대교·청계천에 가서 통역을 하는 도중에 난감한 일을 겪었다. “교량, 거푸집 등 건설 전문 용어가 쏟아져 나와서 식은땀이 줄줄 났어요” 그는 급한 마음에 한자음을 그대로 빌려 ‘교료’라고 통역했다. 그러자 나중에 관광을 마치고 일본 장관이 그에게 살짝 와 “자네, 도대체 ‘교료’가 뭔가?”라고 물었다고. 그녀는 “말만 잘한다고 좋은 통역관이 될 수 없다는 걸 이때 깨달았죠. 알고 있는 단어의 양도 중요하더라고요”라고 겸손히 말했다. 

“원래 내성적이었지만 통역활동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밝아졌어요” 통역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지만 김씨의 꿈은 통역관이 아니다. “국제회의기획자에 관심이 많아요” 꿈을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강한 포부가 느껴졌다. 뚜렷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날갯짓하는 그의 뒷모습이 당당하다.

송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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