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본교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전소설과 고전여성문학을 주로 연구하며 고전문학의 대중화 작업에 관심이 많다. 올해 케이무크(K-MOOC)에 ‘한국문화 깊이읽기’ 강좌를 신규로 개설해 강의한다. 주요저서로 『고전서사와 젠더』, 『고전소설, 몰입과 미감 사이』, 『옛 소설에 빠지다』, 주요역서로 『삼한습유 역주』, 『완월회맹연 교주 1』(공역)이 있다.

 

책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막상 책을 즐겨 읽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글쎄다. 요즘은 시청각 학습 자료가 많아서 학습도 시청 행위와 비슷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깊이와 치밀함을 얻고자 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책을 혹은 글을 읽는 방식을 권하고 싶다. 진정 ‘읽어야 산다’라고 생각한다.

‘보다’와 ‘읽다’가 있다. 책은 ‘보다’보다는 ‘읽다’에 더 어울린다. 책을 보기만 해서는 그 내용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책은 읽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책이 제일 수월하다. 책만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텍스트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읽을 수 있지만, 이때의 읽기란 실은 내가 그 대상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추론하고 정리해야만 비로소 읽기가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그 과정을 누군가가 다 해 놓았고 나는 그저 저자가 그렇게 써 놓은 것을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읽기 중의 가장 수월한 읽기는 아마도 책 읽기일 것이다.

이리 이야기하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쉽사리 읽히지 않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이런 독서는 내 지식을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독서도 자꾸 쌓이면 익숙해진다.

그런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읽는 얘기는 좀 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책 읽기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촉촉해지는 책 읽기라고나 할까? 그날이 그 날인 것처럼 그러나 할 일은 놓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는 나날들 속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자칫 무미건조해진 채로 팍팍푸석한 일상을, 나도 모르게 납작딱딱해지는 가슴을 다시 부풀려 놓는 책 읽기…. 그건 새로운 책을 만날 때일 수도, 아니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확인하는 때일 수도 있겠다.

내게 글쓰기와 책 읽기는 감정과 관련되는 일이 많다. 감정이 나를 압도할 때는 나는 글을 쓴다. 그럴 때는 대개 그때그때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로 방안을 가득 채운 후 그 감정이 소진될 때까지 쓰곤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다시 균형을 회복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책 읽기는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나를 돕는다. 무채색의 나를 조금 흔들어 내게 생기가 돌게 하는 책 읽기. 내가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읽기’란 바로 이런 종류의 읽기를 가리킨다. 이런 책 읽기는 글쓰기와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글쓰기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일 때 나를 구원한다면, 이런 읽기는 그저 하루하루 메마르게 살아갈 때 내 가슴을 떨리게 하고 뭉근한 몰입을 경험하게 하고 어떨 때는 살 용기를 확인하게 해 주면서 나를 충만하게 한다.

요 며칠 햇살에서 봄이 느껴진다. 3월 꽃 피는 봄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음력 정월을 봄으로 쳤던 옛 시간의 감각이 이런 것인가 보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즐겁다. 요즘 읽은 책 중에 ‘지구 끝의 온실’이란 소설이 있다. ‘더스트 폴’이라는 전인류적 재앙 후에 이 지구가 어떻게 멸망하지 않고 인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모스바나’라는 인공 식물 덕분인 것으로 설정했다. 모스바나에서 생기는 푸른 먼지들, 푸른 빛의 기능 없는 아름다움. 기능 없는 아름다움은 삶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 식물은 안전한 돔이나 인공 도시에 들어가지 못한 밀려난 존재들의 마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런 마을이 가능했던 것은 지수와 레이첼이라는 두 인물의 관계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결국은 사랑이라는 범주의 힘으로 설명 가능할 것 같다. 한쪽은 인간, 다른 한쪽은 사이보그와의.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부를 바탕으로 한 연대로 가능해진 거대 도시와 그 안에서의 완벽히 통제된 삶을 미래 사회로 보여주는 우울한 SF적 상상력들에 익숙해서일까? 나는 좀처럼 낙관론자가 되기 어려운 편에 속하는데, 비록 허구이기는 하나 이런 서사는 그래도 희망을 길어 올려준다.

21세기 말 즈음의 인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결국 욕망이 문제이다. 욕망이 문제일 때 나는 때로 ‘구운몽’을 생각하곤 한다. 말도 안 될 만큼의 욕망을 한껏 상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욕망의 끝을 볼 줄 아는 성찰이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을 부추김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은 내 욕망의 문제이다, 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즐거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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