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출판사 대표. 본교 정치외교학과를 1985년 졸업했다. 1985년 편집자로 출판계에 입문해 2000년 마음산책을 창업하고 한결같이 출판인의 길을 걷고 있다.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고 2019년 올해의 출판인 본상을 받았다.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 『나만의 것』, 책 만들며 사는 삶에서 정리한 인문서 『편집자 분투기』, 『책 사용법』, 마음산책 스무 살에 스무 문인과 이야기를 나눈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등을 출간했다.

아침의 루틴이 된 시집 펼치기를 고백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읽는다기보다 거의 기계적으로 시집을 펼치는 행위다. 반응은 두 가지다. 대단히 멋진 아침 의식이라고 공감을 표현하거나 바쁜 아침에 지나치게 한갓지고 낭만적인 거 아니냐는, 철이 덜 든 사람을 걱정하는 반응이다. 그 무엇이든 간에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루틴이다.

알람이 아침을 깨우지만, 정작 나를 깨우는 건 시집의 시구이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시집들이 꽂힌 책장으로 손을 뻗는다. 침실 책장에는 시집만이 꽂혀 있다. 몽롱한 정신에 아무 시집이나 펼쳐, 딱 그 페이지의 시를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다. 읽은 시는 몇 개의 시어로 남는다. 외울 수도 없고 다 이해한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하루를 새롭게 만드는 중요한 의식을 치른 것과 같다.

나는 아침에 시를 읽는다, 이 단순한 문장에는 경이로운 세계가 담겼다. 남루하고 평범한 인생의 어느 하루를 시적인 느낌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시에서 단어가 어떤 단어를 만나 새로워지듯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시집의 시어들을 만나 아침을 다르게 시작할 수 있다.

시 읽기를 아침 습관으로 삼은 것은, 사는 게 도무지 지리멸렬해서였다. 세상사가 맨날 해치워야 하는 숙제 같았고 내가 무심결에 꺼냈던 식상한 말들과 사건사고를 다루는 온갖 매체의 건조한 문장과 가십이 떠도는 인터넷의 선정적인 세계에서 부대끼는 내 영혼을 정화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시는 바늘처럼 단순하든, 물레고둥 껍데기처럼 화려하든, 백합 얼굴 같든, 상관없어. 시는 말들의 의식, 하나의 이야기, 기도, 초대, 아무런 현실감 없이 독자에게 흘러가서 마음을 흔드는,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의 책 ‘완벽한 날들’에 수록된 시 ‘가자미, 일곱’의 구절이다.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이 시라면, 그 흐름 속에 나를 맡기고 싶었다. 마음을 흔드는 진짜 말을 새기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시어들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서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내 안을 정화해주길 바랐다. 시집을 매일 한 페이지라도 읽어야 했다.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목소리로 자연과 삶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시를 쓴 메리 올리버가 이 진절머리 나는, 결코 살기 쉽지 않은 삶을 왜 ‘완벽한 날들’이라고 묘사했을까. 그의 시들은 우리가 잘 보지 못한 세계를 관찰한 데에서 나온다. 생명의 힘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듯하지만 스스로 빛난다. 이 힘이 우리를 지탱해준다고 믿는다. 세상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을 빌려서 나는 순하고 감각적인 기쁨을 누린다.

시인이 애벌레에 대해 노래하든 새와 거미와 개, 나무와 꽃, 딱정벌레를 기록하든 그 말들은 인간 삶의 가치와 연결된다. 혼란스러운 세상사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을 뽑아낸 시인의 시어 덕분에 나는 다른 세상으로 초대되는 셈이다. 도회지에 살며 사무실에서 종일 컴퓨터를 붙들고 사는 나라는 존재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우친다.

메리 올리버는 날마다 프로빈스타운의 숲과 바닷가를 산책했는데, 시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작은 노트에 적었다고 한다. 펜이 없어서 낭패를 보았던 적이 있어서 숲의 나무들에 펜을 숨겨놓기도 했다고. 자신을 자연과 세상을 중계하는 ‘리포터 시인’이라고 불렀던 그에게 새로운 소식이 없는 날은 없었다. 항상 찾아갔던 숲에서 새로운 발견은 언제나 있었으므로.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나날의 운행은 비슷한 듯하지만 작은 보석이 숨어 있는 법. 연필이 있다면, 그 보석에 대해 기록해야 한다. ‘시작하고 전진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연필’은 없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자주 읽으면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 쓰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날마다 조금씩 읽고 쓰는 삶에는 공허가 틈입할 새가 없다. 설령 공허와 허무가 주제인 책을 읽더라도 책장을 넘기며 활력을 얻는다. 아이러니다. 공허에 대해 글을 쓴다 치면 공허는 글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읽고 쓰는 사람을 살리는 글의 세계다.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다/ 평생 나는 경이와 결혼한 신부였노라고./ 평생 나는 세상을 품에 안은 신랑이었노라고.”

메리 올리버의 시 ‘죽음이 찾아오면’의 한 구절을 나의 하루에 대입한다. 하루가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다. 오늘 나는 새로운 시어를 찾았노라고, 오늘 나를 움직인 진짜 언어가 남았노라고.

책을 읽으면 삶의 농도가 짙어진다.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게 만든다. 완벽한 날들을 꿈꾸게 된다. 정말 경이롭지 않은가. 읽으면 만날 수 있는 이 가까운 세계가 보석이지 뭐란 말인가.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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