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서숙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본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30여년 재직, 인문과학대학장 등을 지냈고 2011년 2월 은퇴했다. 저서로 <서숙 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시리즈, 역서로 『런던 스케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마음은 외로운 사냥군』 등이 있고. 『돌아오는 길』 『아, 순간들』 『따뜻한 뿌리』 등의 산문집을 냈다. 넬라 라슨의 장편소설 『패싱』으로 제 1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학기 말에 어수선하지요? 책을 안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강의실로 도서관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들이, 그립고 부럽네요.

나팔꽃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할게요. 작년 가을 버스정류장 옆 울타리에 핀 나팔꽃에서 씨를 받아 보관했다가 올봄에 화분에 심었어요. 볕이 잘 드는 옛날식 아파트 복도에 내놓고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켜보았지요. 기척도 없던 흙 위에 연두색 점들이 나타나더니 작은 잎들이 자라고, 줄기가 올라가고….

어느 날 최초의 꽃 한 송이가 피더니 여름 내내 가을 내내 쉬지 않고 피어났어요. 진한 보라색, 엷은 푸른색, 분홍색 꽃들. 시들거리다가도 피고야 마는 작은 하늘색 꽃. 이들은 내가 일 년 동안에도 듣지 못할 찬사들을 매일 들었어요.

택배 아저씨, 청소 아주머니, 옆집 어머니. 친구들도 많았어요. 아침나절 투명한 햇빛들. 이따금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복도 난간에 비둘기들도 와 앉았어요. 우리가 소중하게 챙기는 꽃들은 이렇게 한 알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는군요.

여러분은 벌써 알아차렸어요. 그래요.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안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읽으면서 모색하고 방황하고 몰두하는 것은 물주고 가꾸며 기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 어느 날 우리 눈에 가슴에 새겨진 활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기 나름의 모양과 색깔로 꽃을 피우겠지요.

톨스토이는 작은 단편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묻고 있어요.

아주 추운 겨울입니다. 가난한 구둣방 주인은 따뜻한 털옷도 없고 양식도 떨어졌어요. 빌려준 돈과 외상값을 받으러 나섰지만 겨우 몇 푼을 손에 쥐게 된 그는, 홧김에 그 돈으로 술을 잔뜩 마셔버려요. 돌아오는 길에 벌거벗은 젊은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 자기 형편을 생각하고 망설이다가 집으로 데리고 와요. 아내는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 그를 받아들이게 돼요. 젊은이는 그의 조수가 되어 구두도 만들고 수선도 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가게에는 부자, 가난한 사람, 발을 절룩이는 소녀 등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요. 몇 년이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이 젊은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는 것이 밝혀져요. 천사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 부부가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사람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또 다리를 절룩이는 고아 자매를 잘 키우는 여인을 보면서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해요.

종교적인 우화로 읽히는 이 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요.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의 힘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책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거쳐 가는 좌절과 갈등, 슬픔과 희열을 통해 내 안의 선과 악과 두려움을 만나요. 삶에 대한 가능성과 회복력, 그리고 존엄성과도 만나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지요.

가끔 연말이면 졸업생들에게서 카드가 옵니다. 그들은 결혼할 때도 이민 갈 때도 우리가 함께 읽었던 소설들을 짐 속에 챙겨갑니다. 식탁 옆 작은 책꽂이에 모아 놓고 가족들이 잠든 뒤, 또는 직장에서 늦게 돌아온 뒤, 그 책들을 열어요. 그리고 밑줄 쳐진 문장들을 다시 읽어요. 강의실에서 책 속에 코를 박고 있던 친구들의 모습이, 무슨 이유였는지 다 잊혔지만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던 광경들이 떠오르기도 해요. 그러면서 자신의 옛날 모습과 다짐들을 되살리며 내일을 준비해요. 우리 안에 묻혀있던 활자의 기억들이 이렇게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지요.

겨울입니다. 천지에 잎들이 떨어져요.

한파가 밀려오기 전에 나팔꽃 씨앗을 받았어요. 동그란 열매를 건드리니 작고 까만 씨들이 손안에 들어와요. 숨 쉬는 이 생명 앞에서 나는 떨려요.

열람실에서, 전철 안에서 책 읽고 있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서숙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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