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에는 한 시대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극장 속 영화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여성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영화진흥위원회가 7월 발표한 '2023년 상반기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상반기 흥행작을 이끈 여성 감독은 단 1명. 영화계에서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는 부족하다. 대형 스트리밍 플랫폼(OTT)이 영화계를 장악한 요즘, 여성의 목소리가 담긴 영화를 한곳에 모아 제공하는 플랫폼이 있다. 국내 유일 여성영화 OTT '퍼플레이(purplay)'다. 퍼플레이는 여성주의를 상징하는 'purple(보라)'과 'play(재생)'의 합성어다. 영화인들의 열정만큼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날, 퍼플레이 사무실에서 대표 조일지(37·여)씨를 만났다.

보라색 외투를 입고 포즈를 취하는 조일지 대표. 퍼플레이에서는 여성과 남성,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다. 제공=퍼플레이 컴퍼니
보라색 외투를 입고 포즈를 취하는 조일지 대표. 퍼플레이에서는 여성과 남성,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만날 수 있다. 제공=퍼플레이 컴퍼니

 

여성영화를 언제나 가까이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그리고 재밌는 여성영화를 한 곳에서 쉽게 볼 수는 없을까." 조대표는 여성영화제에서 본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퍼플레이를 시작했다. 여성영화가 설 자리가 부족하고, 전통적인 영화 배급경로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알게 된 조 대표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직접 가져오기 시작했다. 기존 유통 시장에서 소외된 여성영화를 제공하는 OTT, 퍼플레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퍼플레이는 OTT 서비스뿐만 아니라 영화 관련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관객과 감독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늘리고자 2017년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상영회를 열었고, 온라인 매거진 <퍼줌(purzoom)>을 발행해 국내외 여성영화에 대한 비평과 감독과 배우 인터뷰를 담아내고 있다.

상영회 '퍼플데이'에서 촬영한 사진. 코로나19 이후 상영회는 중단됐다. 제공=퍼플레이 컴퍼니
상영회 '퍼플데이'에서 촬영한 사진. 코로나19 이후 상영회는 중단됐다. 제공=퍼플레이 컴퍼니

 퍼플레이에서 제공하는 영화는 성평등을 평가하는 지수인 벡델 테스트, 여성이 작품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개입했는지를 가리키는 지표인 F등급을 포함한 20개의 자체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된다. 선별된 360여 편의 영화는 영화당 500원에서 4000원 사이의 금액을 개별 결제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제 공하는 영화의 90% 이상이 퍼플레이 독점 상영이며, 여성 감독의 작품이다. 퍼플레이는 구독제가 아닌 건별 결제 방식으로 감독과 관객이 영화에 보내는 관심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유통구조를 단순화 해 여성 창작자들의 더 많은 수익창출을 돕고 있다.

 

여성영화란 무엇인가

'여성영화'란 무엇일까. 퍼플레이 창업 당시, 조 대표에게도 '여성영화'의 정의에 대한 고민 의 시간이 있었다. 여성영화라는 단어가 오히려 퍼플레이의 서비스를 틀 안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지만 퍼플레이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에 그만한 단어가 없었다. 그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여성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영화,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는 영화를 '여성 영화'로 정의하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계에서 동등한 위치에 올라 더 이상 여성영화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때 다른 언어를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영화 선정 과정에서 조대표는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조 대표는 "일상에서는 정치권이나 미디어에서 부각되는 것처럼 성 별 갈라치기 현상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별 갈등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게 일상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는 것이다. "여성영화는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일상 속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처음에는 여성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구성 했지만, 여성의 문화를 담아도 성별에 상관없이 함께 즐겨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퍼플레이 가입 회원은 약 3만 명. 그중 절반이 남성이다. 젊은 여성을 주 고객층으로 설정한 조 대표에게도 '남성 관객이 절반'이라는 것은 놀라운 통계였다. 회원 대상 설문조사를 했을 때도 '제공되는 영화가 좋아서 본다'는 회원이 많았다. 여성영화만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결과다. 퍼플레이는 2021년 9월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지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혐오와 비방을 목적으로 한다기에는 남성 회원의 수가 많아요. 여성의 이야기가 여성만이 아닌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라는 거죠."

사무실 곳곳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와 퍼플레이의 목표. 조일지 대표는 이 곳에서 팀원들과 영화를 향한 열정을 키워 나간다. <strong>임주영 기자
사무실 곳곳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와 퍼플레이의 목표. 조일지 대표는 이 곳에서 팀원들과 영화를 향한 열정을 키워 나간다. 임주영 기자

 

위기를 기회로, 퍼플레이의 성장

서비스가 유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코로나19는 퍼플레이에 악재였다. 정기적으로 진행하던 여성영화 상영회를 더 이상 진행 할 수 없었고, 영화제를 통한 홍보가 어려워져 관객들과 직접 만날 창구도 사라졌다. 이에 대응하고자 퍼플레이는 온라인 극장과 영화제를 기획했다. 코로나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화상 회의를 이용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여전히 퍼플레이의 온라인 극장을 이용하고 있다. 조 대표는 소형 OTT에 찾아온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꿨다.

퍼플레이는 2020년부터 영화 제작 수익을 비영리 단체에 후원하는 '함께 프로젝트'도 진행해왔다. 코로나19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에도 2020년에는 이경미 감독의 영화 '아랫집 (2017)', 2022년에는 이영음 감독의 영화 '까만점(2021)'으로 얻은 수익금을 십대여성인권센터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기부했다. 단순히 영화로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로 얻은 수익을 사회로 환원하며 사회적 기업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퍼플레이는 관객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또 다른 준비를 하고 있다. OTT 내에서 관객과 관객이 상호작용하는 서비스를 개발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조성하는 것이다. 조 대표는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내 이야기를 오해 없이 전달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키워야 해요. 저희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영화가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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