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하나 남은 갯벌이 있다. 이름은 수라, ‘비단에 놓은 수’라는 뜻이다. 영화 ‘수라’(2023)의 감독 황윤(영문∙95년졸)씨는 새만금 간척 사업이 이뤄진 군산에서 수라 갯벌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새만금 간척은 전라북도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방조제를 축조해 간척토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간척토지에서는 신공항 설립과 여러 개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간척 과정에서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은 인간의 욕망을 이유로 파괴됐다. 많은 도요새와 물새, 조개들이 집을 잃었다.

수라 갯벌에 서식하는 쇠제비갈매기 새끼의 모습. 제공=미디어나무
수라 갯벌에 서식하는 쇠제비갈매기 새끼의 모습. 제공=미디어나무

2014년 황 감독은 군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물새를 기록하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조사단)의 오동필 단장을 우연히 만났다. 아직 갯벌이 남아 있냐는 황 감독의 물음에 오씨는 그를 수라로 데려갔다. 마침 그 날은 한 달에 한 번 조사단이 정기적으로 새들을 관찰하러 갯벌로 향하는 날이었다. 황 감독의 눈앞에는 멸종위기종 1급인 저어새 150마리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첨벙거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라 갯벌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새들이 삶을 영위하는 안식처였다. “간척으로 완전히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갯벌이 있더라고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갯벌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던 오만함을 반성하는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만감이 교차하던 그 순간부터, 수라 갯벌과 이를 지키는 조사단의 모습을 담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영화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간척 사업으로 변화한 갯벌의 모습과 살아남은 생명체들, 그리고 환경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카메라를 들어야 할 곳은 

소외된 생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건 2001년 동물원의 새끼 호랑이 ‘크레인’과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어린 호랑이는 어두컴컴한 사육장에서 홀로 구슬피 울어댔다. 야생성을 잃은 채 갇힌 호랑이의 모습은 방송에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물원의 최연소 스타로 비쳤다. 카메라는 진실을 알리기도 하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황씨는 그가 카메라를 들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수라 갯벌의 겨울을 촬영하는 황윤 감독. 제공=미디어나무
수라 갯벌의 겨울을 촬영하는 황윤 감독. 제공=미디어나무

야생동물을 가두는 동물원, 로드킬, 공장 축산그리고 간척사업과 갯벌까지. 황 감독의 영화는 사회의 관심 밖에 있는 생명들을 담아낸다. 그는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스피커”라고 말했다. “감히 그들의 시선 자체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카메라를 들 힘이 있을 때까지 이들 편에 서고 싶어요.”

잔잔한 호수에 꾸준히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듯 황씨의 작품은 사회 변화를 만들어 냈다. 영화 ‘작별’(2001)은 동물원법 제정을 이끌어냈고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2008)는 야생동물 로드킬 현실을 알려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수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통해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관객들은 수라 갯벌에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4월과 5월, 관객들은 직접 갈대밭을 지나고 질퍽한 흙을 밟는 체험을 통해 수라 갯벌의 진가를 느꼈다.

 

7년간 담아낸 수라 갯벌의 이야기

‘수라’ 제작에는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들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땅이면서 바다인 갯벌에서의 촬영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밀물과 썰물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바닷물이 갯벌에 얼마나 들어왔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갯벌의 생물들은 황 감독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을 마주하며 지치기도 했지만, 그를 일으킨 건 결국 생명이었다.

특히 뉴질랜드에서 출발해 서해를 거쳐 알래스카까지 날아가는 큰뒷부리도요새의 장거리 비행은 황 감독에게 영화를 완성할 용기를 줬다.

나도 도요새처럼 한창 날아가는 중인거야. 

조금만 더 힘내보자.

10일, 황윤 감독은 신촌 아트레온 CGV 에서 열린 생명의 공존의 염원을 담은 영화 '수라'의 시사회를 열었다.   박성빈 사진기자
10일, 황윤 감독은 신촌 아트레온 CGV 에서 열린 생명의 공존의 염원을 담은 영화 '수라'의 시사회를 열었다. 박성빈 사진기자

도요새들이 그들의 종착지 알래스카로 날아가듯 황 감독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움직였다. 손톱만큼 작은 게들이 모래로 단단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척박한 땅 위에서 새끼를 길러내는 광경도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황씨는 드론으로 촬영한 갯벌의 모습을 “우주가 그린 예술 작품”이라고 부른다. 갯벌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추상화 같기 때문이다.

황 감독의 여정에는 갯벌을 잊지 않고 지켜낸 조사단과 단장 오씨가 함께했다. 이들은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빠짐없이 기록해 뒀다. 덕분에 황 감독은 잊히고 사라져가는 새와 조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백 장이 넘는 사진 테이프, 여러 생물종이 정리된 두꺼운 책에서 조사단의 끈기와 간절함이 느껴졌다.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는 힘, 수라

‘수라’는 정식 개봉 전이지만 관객 주도하에 이미 30차례 가까이 시사회를 진행했다. 관객이 여는 시사회는 영화계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시민들은 각자의 거주 지역 근처에서 시사회를 열 수 있는 극장을 찾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갯벌을 지키기 위한 마음이 모였다. 영화 속에는 “아름다움을 본 것도 죄인가?”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갯벌의 아름다움을 본 이상, 죄인이 된 것처럼 자연히 갯벌을 지키게 된다는 의미다.

관객들도 그 아름다움을 본 죄인으로서 그 죄책감을 덜고 있는 것일까. 영화 개봉일에 100개 극장에서 100명씩 1만 명이 영화를 보자는 관객 운동도 진행 중이다. 독립예술영화와 갯벌을 지키기 위한 관객들의 노력이다.

황 감독은 후배들에게도 주변 생물에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생명체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주변을 향한 작은 관심은 여러분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 거예요.” 황 감독은 이제 새들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도 한다. “도요새가 오면 봄, 기러기가 오면 겨울이에요. 예전엔 몰랐죠.”

‘수라’는 6월21일 개봉 예정이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에는 농게, 검은머리갈매기 등 수백 종에 달하는 생명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황 감독의 마음이 담겨서일까. 영화 ‘수라’에서는 동물과 사람, 그리고 환경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된다. 작고 여린 생명의 시선이 필요한 곳이라면 카메라와 함께 어디든 향하는 황 감독의 다음 행선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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