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운 전개, 멋들어진 액션, 감동적인 음악…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그중 인물의 솔직한 내면 이야기로 관객을 사로잡은 영화가 있다.

2월8일 개봉한 ‘다음 소희’(2023)는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갔다가 고객들의 폭언과 회사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고등학생 소희의 이야기다. 영화 ‘도희야’(2014) 이후 9년 만에 돌아온 정주리 감독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소희의 감정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희의 깊은 내면과 감정은 거창한 액션 연기나 화려한 음악 없이도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11일 저녁, 건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정주리 감독을 만났다. 털털하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 ‘다음 소희'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 어떤 감독이 되고싶냐는 질문에 그는 ‘훌륭한 감독'이 되기 위해 한 편이더라도 제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자빈 사진기자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 ‘다음 소희'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 어떤 감독이 되고싶냐는 질문에 그는 ‘훌륭한 감독'이 되기 위해 한 편이더라도 제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자빈 사진기자

 

이야기에 사로잡혀 시작한 영화

시작은 제작사의 제안이었다. 2020년 말, 그는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제작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2017년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간 전주의 특성화고 학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다. 모두의 관심이 대통령 탄핵과 촛불집회에 쏠려 있던 2017년, 홀로 죽어갔던 여고생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그 사건 전에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다는 게 굉장히 큰 무게로 다가왔어요.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는 게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큰 동기였어요. 이 이야기에 사로잡혔죠.” 그는 실습생들의 죽음이 반복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인물들의 ‘감정’

제작사는 상업 영화를 먼저 제안했다.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미스터리나 스릴러, 액션 등 확고한 장르 영화를 원한 것이다. 이에 정 감독은 역으로 제안했다. “소희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그는 혼자 고립되다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소희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죠.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만들고 영화를 완성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에요.” 그는 영화를 통해 가족, 친구, 선생님과 원만하게 지내던 소희가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외로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전반부가 주인공 소희의 시점에서 흘러간다면, 후반부는 형사 유진의 시점에서 소희의 죽음을 추적한다. 유진의 수사 과정에서 소희의 죽음 뒤에는 실적을 쌓기 위해 실습생을 압박하는 학교, 교육청, 콜센터 회사가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그가 고등학생 실습생이 겪는 폭언과 부당함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 감독은 오히려 ‘어쩌다 한 사람이 혼자가 되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했다. “후반부가 사건의 배후를 밝히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짚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유진의 행적은 소희라는 사람의 죽음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에요. 제가 그린 ‘다음 소희’는 그런 영화예요.”

정 감독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전형적인 모습을 피해 간다. 그는 인물의 모순적인 모습을 영화 속에 그대로 담아낸다. “등장인물은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살아 있어야 해요. 영화 속 상황과 조건 안에서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관객들에게 전달이 돼야 온전하게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음 소희’에서 콜센터 팀장은 소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좋은 사람이지만, 실적 압박에 시달려 실습생들에게 소리를 치며 화를 내기도 한다. 영화 후반부의 교육청 장학사는 소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사건에 대해 캐묻는 유진에게 적당히 하라며 유진을 불청객 취급한다. 정 감독은 “우리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듯이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말했다. 모순되고 복잡한 지점들을 다 담고 있는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훨씬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가 부여한 현실성 속에서 살아 있는 인물들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포기하지 않고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힘

그의 장편영화 두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한국 영화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주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주인공인 남성 캐릭터의 조력자 혹은 연인으로 등장한다. 정 감독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이 주인공이거나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가 주류인 상황에서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고 고백했다.

‘다음 소희’에는 또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악역 캐릭터까지도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콜센터에 새로 온 여성 팀장은 직원들에게 실적으로 압박을 주는 캐릭터다. 소희의 죽음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안일하게 반응하는 장학사 캐릭터도 여성이다. 정 감독은 여성 악역을 넣는 것이 “나름대로의 소소한 재미”라고 말하며 웃었다. “영화 속에서 남성이 주로 악역을 맡던 걸 깨 보고 싶었어요.”

어떤 감독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 정 감독은 ‘훌륭한 감독’이라고 답했다. “영화 만들 때는 영화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니까 외롭고 힘들지만, 막상 영화가 공개되고 나면 고민이 사라져요.” 그는 영화가 개봉한 뒤 자신의 영화에 영향을 받는 관객들을 보고, 함께 감정을 주고받으며 처음 영화에 반했던 이유를,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포기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됐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감독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여운을 나눌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뜻하는 게 아닐까.

그는 “차기작으로 어떤 걸 만들게 될지 모르겠지만, 역시 진지한 드라마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어렵더라도 어쨌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한 편 한 편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어요.”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