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학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사와 더불어 학과장 업무가 시작되었다. 유례없는 폭염 중 이사였기에 직원 선생님들과 조교들의 고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전공연구실에 놓아야 하는 책상 31개 중 반 이상이나 부품이 분실되어 고군분투하는 등 재개관한 학관은 묵직한 실감으로 내게 다시 찾아왔다.

학관과의 첫 만남은 학력고사 당일이었다. 그때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라, 지원 한 대학에서 시험을 치렀고, 추운 겨울날 계단식 대형 강의실 108호에서 시험을 봤다. 하나의 공간인데, 라디에이터가 나오는 창가 쪽은 무덥고, 복도 쪽은 냉기가 돌았다. 자리 배정은 복불복이었고, 복도  쪽에 앉은 나는 시린 손을 비벼가며 마킹을 해야 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먹던 점심시간에 구수한 남쪽 말투로 유난히 크게 떠들던 아이를 입학 후 만났을 때의 반가움, 어느새 그 아이와 단짝이 되어 학 관 과방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국문인들은 주로 학관에서 생활했다. 2층 강의실에서 전공 수업을 듣다 보면, 학관 뜰의 하얀 목련이 이른 봄을 알려주었고, 해가 갈수록 전공 수업의 재미와 동기생들과의 우정이 깊어져 갔다. 누구보다 열혈 이화의 국문인이 된 나는 추위를 많이 탔음에도 '석빙고'란 별칭이 붙은 추운 학관에서 대부분의 대학 시절을 보냈다. 창작학회 세미나도, 노래패 연습도, 대동제와 기린제 준비도 학관 과방에서 했다. 대학 시절 뭔지는 몰라도 '치열하게' 살고 싶었던 우리에게 학관은 좀 멋있는 장소 였던 것 같고, 이렇게 내게 학관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

학관은 이상이 설계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지만 그런 말이 돌 정도로 공간 구성이 묘했고,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과사무실 조교 근무를 하면서는 심부름을 많이 다녔는데, 학관 3층에서 본관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다. 가장 빠른 길은 여자 화장실을 통과해야 하는데, 교수님들이 함께 이동하시다가 여자 교수님들이 당연스레 지름길을 통과하시는 바람에 남자 교수님 한 분이 홀로 뒤에 남겨졌다는 웃지 못할 전설이 국문과에는 전해온다. 교수가 된 이 후에도 남자 교수님들과 이동하다 그 여자 화장실을 맞닥뜨릴 때면 이 전설을 상기하며 속으로 웃는다. 그렇다. 학관에서 수업을 듣던 내가 이제는 학관에서 수업 한다.

내게 학관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과 사람 냄새 가득한 소중한 장소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학관의 달라 진 점보다는 다시 학관에서의 생활이 재개되리라는 기대가 더 크게 다가온다. 기부자이자 학과장이라 학관 리모델링 및 신축 봉헌식에 초청되었는데, 행사에 참 여하면 새로운 학관의 면모가 실감 날지 모르겠다. 낙후된 시설이 개선되고, 강의실 창호 교체로 소음 문제가 해결되고, 신축 부분에는 첨단강의실 등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서 더욱 안전해지고, 편리해지고, 새로워진 학관에서 다시 가르치고 생활할 새 학기가 기대된다. 그리고 드디어 학관을 만나게 될 국문인 포함 이화인들이 나처럼 학관의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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