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우리는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도록 이화 곳곳에서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본지는 5월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이들의 일과와 삶을 조명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양사·조리장, 캠퍼스 폴리스, 셔틀버스 운전기사, 청소노동자의 이야기를 5월 4주간 연재한다. 

 

학문관 4층 동아리방 청결과 미관을 책임지는 14년차 청소노동자, 김순자 반장. 박성빈 사진기자
학문관 4층 동아리방 청결과 미관을 책임지는 14년차 청소노동자, 김순자 반장. 박성빈 사진기자

“대박아, 할머니 일 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어!” 김순자(69·여)씨는 반려묘 ‘대박이’에게 인사하며 집을 나선다. 새벽 5시15분이다. 그의 하루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다. 김씨는 2010년부터 본교 학생문화관(학문관) 청소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어느덧 본교에서 일한 지 14년 차인 그는 학문관에서 제일 오래 근무한 청소노동자다. 학생들이 바쁜 일상 속 쉼이 필요할 때 찾는 곳, 학문관의 청결을 책임지고 있는 김씨를 만났다. 

어스름한 새벽, 김씨가 271번 버스를 타고 이대후문 정거장에 내려 학문관에 도착하면 시계는 어김없이 5시45분을 가리킨다. 일한 지 14년째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다. 학문관 청소노동자들의 반장인 그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일찍 출근해 근무자들의 출근, 지각, 휴가 상황을 관리자에게 보고한다. 

본격적인 근무는 6시30분부터 시작한다. 학문관 3층 사회봉사팀 사무실을 청소한 뒤 그의 전담 구역인 학문관 4층으로 간다. 4층에 있는 쓰레기를 모두 수거해 쓰레기봉투에 넣어 묶고 B1층으로 가서 몸집보다 큰 쓰레기봉투를 몇 개씩 버린다.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 이 작업을 반복한다. 그는 “허리야 아프지만 쓰레기가 많은 게 좋다”고 말했다. “쓰레기가 많은 건 학생들이 그만큼 잘 먹고 하루를 즐겼다는 뜻이잖아요.” 또 김씨는 “일의 강도는 세지만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대박이에게 간식 사줄 돈도 벌지 못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순자 반장이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게 쌓인 쓰레기를 수거해 학문관 옆 쓰레기 매립장으로 옮기고 있다.  박성빈 사진기자
김순자 반장이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게 쌓인 쓰레기를 수거해 학문관 옆 쓰레기 매립장으로 옮기고 있다. 박성빈 사진기자

이런 김씨도 청소하면서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다. 바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와 막힌 변기를 뚫어야 하는 순간이다. 대개 음식물 쓰레기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기 때문에 무겁다. 허리에 염증이 있는 김씨는 “무거운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할 때가 제일 곤욕”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얼마 전에 학문관 4층 화장실 변기 4개가 모두 막혀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변기 막히는 것의 주원인은 학생들이 휴지를 너무 많이 집어넣는 거예요.” 김씨는 “제가 직접 ‘양심’이라고 빨갛게 종이에 적어서 여기 붙여놨다”며 웃으면서 화장실 타일을 가리켰다. “학생들이 양심에 손을 얹고 변기가 막히지 않게 잘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썼어요.” 

오후5시에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간다. 동물을 사랑하는 그는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달랜다. 방송이 방영되는 시간엔 꼭 대박이와 함께 누워 TV를 본다. “허리가 아파서 집에서는 찜질하며 누워 있어요.” 김씨의 허리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은 몇 해 전 대동제 때문이다. “몇 년 전 대동제 주간에 토요일 특근(특별 근무)이 걸렸어요. 그날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쓰레기를 치우다가 허리가 병이 났죠.” 이번 대동제도 김씨에겐 고역이었다. 동아리방이 몰려 있는 학문관은 대동제 부스 한가운데에 있어 건물 곳곳에서 음식을 먹는 학생들이 많고 음식 잔여물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김씨와 늘 함께하는 반려묘 '대박이'의 모습이다. 김수미 기자
김씨와 늘 함께하는 반려묘 '대박이'의 모습이다. 김수미 기자

김씨가 처음부터 청소노동자로 일했던 건 아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대전에 살던 김씨는 22살 결혼을 하며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하게 됐다. 이혼 후 남편은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가버렸다. 김씨는 한시라도 일을 쉴 수 없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아 남편으로부터 두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회 지인 소개로 간 남대문 시장 ‘형제 김밥’에서 주방장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하루에 가마솥 1개 하고도 반에 가득 채워질 만큼 김밥을 말았다. “80년대 남대문 시장은 말도 못 해요.” 주방은 비좁았고 연탄불 연기가 자욱했다. “우리 아들, 딸을 나한테 데려와야 하니까 그것만 보고 버텼죠. 시장에서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내 아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젊은 날을 회상하는 김씨의 눈시울이 붉었다. 두 아이만을 생각하며 쉼 없이 일한 끝에 6년 만에 자녀를 품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김씨는 그렇게 두 아이를 낯선 서울에서 혼자 키웠다. 

40대 중반에는 딸과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아이 돌보는 걸 좋아해 어린이집 원장으로 10년을 지냈다. 김씨는 생후 3개월 된 신생아를 전담으로 돌봤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던 김씨는 “학부모들과의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껴 어린이집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늦은 새벽에도 전화해서 오늘 원에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 학부모도 있었어요. 근데 또 그다음 날 아침에 등원시키면서 우리한테 미안했는지 케이크를 사 들고 오시는 거예요. 새벽에 그렇게 전화했으면 끝이지. 이런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죠.”

어린이집을 정리한 후 김씨는 지인 소개로 본교에서 일하게 됐다. 원체 꼼꼼한 성격인 그는 “청소 업무는 나에게 주어진 것만 잘하면 마음 편하게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무로 둘러싸인 학문관에서 일하는 게 참 좋아요.” 김씨는 휴식 시간에는 학문관 앞 벤치에 가서 꽃이나 나무를 구경하기도 한다. 식물을 좋아하는 그는 학문관에서 지내던 교수들이 두고 간 화분들을 모두 모아 볕이 잘 드는 4층 복도에서 정성으로 키운다. “학문관 어딜 가도 이렇게 식물이 많은 곳은 없어요.” 김씨는 가장 좋아하는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김씨의 집 옥상 텃밭에서 여러 가지 채소가 자라고 있다. 김수미 기자
김씨의 집 옥상 텃밭에서 여러 가지 채소가 자라고 있다. 김수미 기자

김씨의 식물 사랑은 집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집 옥상 텃밭에서 상추, 옥수수, 콩 등을 키운다. “잘 자란 상추는 뜯어와서 동료들과 점심으로 먹어요.” 옥상 텃밭을 소개하면서 “올해는 상추보다 콩이 더 잘 자란다”며 “콩을 여러 개 심을 걸 그랬다”고 말하는 김씨의 얼굴에서 즐거움이 비쳤다. 

그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채플 끝나고 대강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보면 활력을 얻어요. 밝게 인사해 주는 학생들 보면 참 예쁘고 힘이 솟아요.” 

그는 2024년 12월31일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학문관을 청소하고 싶어요. 학생들이 있기에 내가 있는 거예요.” 김씨는 “오늘도 우리 학생들 무사하고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하늘에 기도하며 매일 새벽 문밖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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