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처럼 맑고 변함없는 진심을 기억하며, 혜리에게

편집자주 | 2022년 10월29일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의 희생자인 故최혜리(동양화·23년졸)씨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같은 캠퍼스를 거닐었던 이화인이자 친구였고 제자였던 최씨를 기억하고 우리 모두를 위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졸업장 하나가 하늘로 전해졌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본교 故최혜리(동양화·23년졸)씨의 졸업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최씨는 줄곧 화가를 꿈꿨다. 업으로 삼기에 어려운 직업이라는 문제는 그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강릉에서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뛰어난 실기 실력을 보이던 최씨는 긴 여정 끝에 본교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최씨는 차분하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는 당찬 사람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떨어져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믿음직스러운 딸이었고, 교수들에게는 밝은 미소와 미래를 가지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본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디자인학부를 복수전공하며 공간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꿈을 찾았다. 졸업을 앞둔 2022년 7월에는 실내 인테리어 회사에서 수습 직원으로 일하며 디자인학부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3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정직원이 된 지 5일째 되던 날, 그는 집에서 가까운 약속 장소였던 이태원을 찾았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통화가 어머니 김씨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최씨는 많은 사람의 배웅 속에서 하늘로 떠났다. 그는 떠났지만, 교수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졸업 전시를 마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같이 나와 대학생활까지 함께했던 친구들은 그가 떠나기 직전까지 정성을 다했던 전시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동안 최씨가 전시를 준비했던 과정과 친구들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전시했다. 모든 졸업 요건을 이수하고, 졸업만을 남겨뒀던 최씨의 졸업장은 2월27일 그의 어머니에게 대신 전달됐다.

그는 이화의 가족이었고, 친구이자 제자였다. 최씨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어머니 김영남(62·여)씨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故) 최혜리씨. 제공=김영남씨
작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고(故) 최혜리씨. 제공=김영남씨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소녀는 2017년 이화의 가족이 됐다.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학생이었다. 밝은 미소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맑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준비했다. 언젠가는 디자인 사무실을 차리고 싶다는 목표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항상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화가를 꿈꾸던 당찬 아이

어머니 김영남(62·여)씨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최씨는 ‘내성적이지만 할 일은 다 하는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어요.” 최씨는 종종 학교나 강릉시 미술 대회에서 상을 타오곤 했다. 유치원 때부터 화가가 꿈이라고 했던 아이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화가로 성공해 돈을 벌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그림은 취미로만 남겨뒀다. 그렇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최씨는 중학교 3학년 때 강원예고에 가겠다 말했다. 엄마는 그런 딸에게 “서울에 있는 예고에 붙으면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최씨는 선화예고에 합격했고, 엄마도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서울로 향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모녀는 서울에서 함께 지냈다. 두 모녀는 애틋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만큼 친했다. 

선화예고에서도 최씨는 두각을 드러냈다. 그림을 잘 그려 실기는 항상 상위권이었고 교내 상을 여러 번 수상하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강릉에서 상경했던 최씨는 바라왔던 대로 본교에 합격했다. 김씨는 아직도 합격 발표가 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혜리가 이화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며 학교에 대한 딸의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계속 붙어 살았던 모녀는 그때부터 떨어져 살게 됐다. 최씨는 서울에 남고, 어머니 김씨는 강릉으로 돌아갔다. “떨어져 지냈지만 믿음이 있었어요. 자기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아이라서.”

 

최씨가 선화예고 재학 시절 받은 상장들과 본교 합격증서. 제공=김영남씨
최씨가 선화예고 재학 시절 받은 상장들과 본교 합격증서. 제공=김영남씨

용돈도 스스로 벌어 쓰는 딸이었다. 방이동의 한 미술학원에서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홍대나 신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 벌리지 않는 딸이었는데…” 엄마와 딸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만났다. 그런데도 김씨는 딸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스로 알아서 잘 지내는 딸이었다. “저희는 다른 부모처럼 반찬을 따로 해준다거나 냉동해서 택배 보내고 그런 적 없었어요."

순수미술(동양화)을 전공하던 최씨는 대학에 다니면서 “자기 돈벌이는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고민 끝에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중 상업적 디자인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 디자인학부를 복수전공하기로 선택했다. 김씨는 “그렇게 하려면 시간을 엄청 투자해야 하는지 그래서 (딸이) 강릉에 자주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매일 과제를 하고, 전시 준비를 위해 밤샘 작업을 마치면 새벽이었다. 최씨는 일을 마친 새벽에도 엄마와 종종 통화했다. 

 

작품을 그리고 있는 최씨의 모습. 제공=김영남씨
작품을 그리고 있는 최씨의 모습. 제공=김영남씨

미래를 위해 택한 디자인이었지만 최씨의 적성에 맞았다. “나중에 한 마흔 정도 돼서는 자기 사무실을 차리고 싶다, 차릴 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죠.” 최은신 교수(디자인학부)는 “혜리 학생은 공간디자인을 복수전공하면서 늘 진심으로 고민하고 프로세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며 “목표가 뚜렷했던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최씨를 원하던 기업도 많았다. 고민 끝에 한 실내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했다. 아직은 경험을 더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3개월 동안의 수습 기간을 거쳐 2022년 10월25일에 정직원이 됐다. 참사가 일어난 10월29일은 최씨가 정직원이 된 지 5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은 무슨 일이 있었나

학교에 다니며 취업 준비를 한 탓에 최씨는 취업하고 나서도 하루도 쉬지 못했다. 평일에는 근무하고 주말에는 학교에 와서 졸업 전시 준비를 했다. 그날도 본교에서 골프 강습을 받고 졸업 작품을 준비했다. 저녁에는 다른 학교 동아리 동생과 연락이 닿아 저녁을 먹기로 했다. 취업한 회사가 압구정에 있어 집을 약수동 쪽으로 옮겼던 최씨는 집에 잠시 들렀다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수역에서) 이태원까지 두 정거장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로 간 거예요. 가까운 데 간다고.” 그날 처음부터 이태원에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10시33분, 최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고, (혜리를) 불러도 비명 같은 소리만 들렸어요.” 김씨는 딸이 길에서 벌어진 싸움 현장 옆으로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뉴스에서 이태원 참사 관련 뉴스가 나왔을 때도 불안했지만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같이 갔던 친구한테서 오전1시30분인가에 전화가 와서 알았어요. 언니 손을 놓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가족들은 오전2시가 넘은 시간에 서울로 향했다. 오전10시경 강릉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서에서는 지문을 감식한 결과 최씨가 일산 동국대 병원 영안실에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계속 기다렸는데 (혜리를) 안 보여주더라고요.” 가족은 오후5시를 넘긴 시간에야 최씨를 볼 수 있었다.   

마땅한 (영정)사진을 찾기도 어려웠다. 10일 동안 핸드폰을 찾지 못한 데다가, 정면 사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도 다 마스크 쓰고 찍고, 뒷모습만 찍어서…그런데 한글날인가에 강릉에 와서 강아지랑 찍은 사진이 있어서 그걸로 했어요.” 장례식장에는 최씨를 기억하는 주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최씨를 가르쳤던 교수들도 장례식장을 찾았다. 김씨는 “(혜리가)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님이 많이 오셨다"며 당일을 회상했다. 최씨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마지막을 함께했다. 

 

최씨가 반려견과 함께 미소 짓고 있다. 제공=김영남씨
최씨가 반려견과 함께 미소 짓고 있다. 제공=김영남씨

최씨는 떠났지만 교수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졸업 전시를 마칠 수 있었다. 인턴으로 일하면서도 프로젝트를 이미 많이 진행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씨와 고등학교에서부터 함께 했던 동기들은 그와 함께 졸업 전시를 마무리하길 원했다. 친구들은 최씨의 사진과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모으고 영상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전시디자인졸업연구 지도 교수였던 서여원 교수(디자인학부)는 “(혜리 학생이) 방학 동안에도 틈틈이 디자인을 발전시켜 왔고 항상 디자인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기에 안타까웠다"며 “그동안의 진행 과정을 취합해 전시하면 혜리 학생만의 디자인이 잘 드러나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최씨가 졸업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졸업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이수했기에 2023년 2월27일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최씨의 디자인학부 졸업전시 프로젝트. 최씨의 동기들과 담당교수가 함께 준비해서 대신 마무리했다. 그동안의 디자인 진행 과정과 친구들의 메세지를 영상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제공=김영남씨
최씨의 디자인학부 졸업전시 프로젝트. 최씨의 동기들과 담당교수가 함께 준비해서 대신 마무리했다. 그동안의 디자인 진행 과정과 친구들의 메세지를 영상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제공=김영남씨

 

미처 건네지 못했던 말들

김씨는 딸이 떠났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도 애가 간 거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샤워하다가도 생각나면 눈물이 흘러내리고…그냥 수시로 그래요.” 얼마 전 신촌역에서는 딸과 함께 앉아서 얘기했던 한 저녁이 생각나 눈물을 흘렸다. 강릉 본가는 최씨의 짐으로 가득하다. 서울에서 떨어져 살던 딸의 짐을 몽땅 가져온 탓이다. 김씨는 딸이 쓰던 핸드폰으로 최씨가 남기고 간 흔적을 보고 또 본다. 모녀는 공유하지 않고도 같은 비밀번호를 쓰고 있었다. 

김씨는 “(혜리가) 너무 열심히 살아줘서 항상 고맙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다”며 “칭찬을 많이 해주지 못한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항상 밝게 웃는 혜리 학생의 웃음을 생각하면 제 마음도 같이 맑아지는 것 같다"며 “짧은 학기 동안이었지만 혜리 학생을 지도하면서 저도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기에 기억에 남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한지처럼 맑고 변함없는 진심을 가진 학생"으로 최씨를 기억했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못 했어요.

한번 꿈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꿈에도 안 나오고 그래요.

(혜리가) 다시 한번 앞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어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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