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사랑하는 행위의 가장 마지막 단계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뜨거운 가슴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여성들이 있다. 영화, 웹툰 그리고 게임까지. 양질의 콘텐츠로 대중에게 새로운 롤모델을 선보이고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창작자들이다.

본지는 22일 여성 콘텐츠 기획 4주차를 맞아 다양한 분야에 직접 종사하는 여성 창작자를 만났다.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2021), ‘이태원’(2019) 등으로 이름을 알린 강유가람 감독, ‘2048 Muug’와 ‘자라나라 가시가시’(가시가시) 등을 개발한 1인 게임 제작사 레드민스 박민성 대표, 2021 다양성 만화 제작 지원사업 선정작 ‘한 점 부끄럼 없이’를 연재 중인 뻥 작가, 인기리 연재 중인 ‘정년이’의 스토리 구성을 맡은 서이레 작가, 그리고 채식과 여성의 삶을 다루는 ‘두연씨 잘 먹고 잘 살아요’(두잘잘)의 하토 작가다. 레드민스 박 대표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화상 회의 프로그램 줌(Zoom)을 통해 참가했다.

 

왜 이 장르를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인지

강유가람(강): 특별히 선택했다기보다는 먼저 다큐멘터리(다큐)를 시작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왕자가 된 소녀들’(2013)이라는 여성 ◆국극 배우들의 삶을 담은 다큐에 조연출로 참여했었는데 제가 몰랐던 여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어요. 촬영 과정이 즐겁기도 하고, 제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토(하): 너무 멋있게 답변해주신 거 아니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뻥: 웹툰은 개인 작업을 하기 용이하니까 독립성이 많이 보장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얘기하기 더 편하달까?

서이레(서): 웹툰이 수용하는 장르가 생각보다 넓어요. 정년이도 처음 구상했을 때 ‘소설로 쓰면 어디서 연재할 수 있을까?’ 고민했거든요. 웹 소설로도 부적합하고 기존 문단에서 데뷔할 수 있는 스토리도 아니고, 그래서 웹툰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웹툰은 어느 정도 대중성이 확보됐고 접근성이 높은 매체에요. 작가라면 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레드민스(레): 저도 어릴 때부터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만들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게임은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할 수 있거든요.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게임을 선택했다기보단, 게임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담은 것 같아요. 

 

작품을 구성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점에 두는지

강: 저도 페미니스트이긴 하지만 완전무결하진 못해요. 저에게도 편견이 있잖아요? 제 선입견으로 실존 인물을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분들의 의도를 살려 편집하려고 해요. 오류를 깨달았다면 작품 속에서 이를 드러내고요.

뻥: 현실은 제한적이지만 콘텐츠를 통해 타인의 관점이나 욕망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야를 넓힐 기회기도 하고요. 그래서 기혼여성, 비혼여성, 나쁜 여성과 같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어요.

하: ‘두잘잘’은 제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구상한 작품이에요. 환경 문제는 오래전 제기됐지만, 아직도 해결이 더디잖아요. 게다가 한국은 관련 콘텐츠가 많지 않으니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더 많이 채식을 접하고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여성의 입을 빌어 그려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면 기만적이라는 느낌도 있었고, 창작물을 보고 따라 하며 이입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여성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었어요.

 

업계와 현실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를 비롯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체감하는지?

서: 굉장히 기쁜 일이죠. 제가 ‘보에’(VOE)를 연재하던 2015년에 임신 여성이 받는 회사 내 차별 등을 다뤘는데 관심은 못 받고 댓글로 공격받았거든요. 지금은 그래도 봐주는 사람이 있고 독자층도 의식적으로 여성 서사를 소비해줘야 한다는 흐름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의무감으로만 본다면 답답하지 않을까요? 이 작품으로 무엇을 느끼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면 더 즐겁게, 오랫동안 여성 서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 저도 일단은 기뻐요. 여성주의자로서 풀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면 얘기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 같거든요. 독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이 높아졌으니 머리가 짧은 여성 캐릭터처럼 ‘보통’을 깨는 캐릭터 조형이 가능해져요. 이 정도를 받아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더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거죠.

서: 맞아요, 원래보다 하나 더 하게 돼요. 예전에는 기준선이 50이어서 60까지 시도했지만, 요즘은 기준선 자체가 100이니까. 여성 얘기와 더불어서 퀴어 소재까지도 많이 차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강: ‘왕자가 된 소녀들’ 개봉했을 때가 2012년이었거든요. 이런 영화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쏟거나 팬덤이 만들어지기는 어려웠죠. 2016년 이후부터는 확실히 여성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알아봐 주는 관객도 많아졌어요. 콘텐츠를 즐기는 10~30대 여성들의 시선이 달라지면서 이전의 남성 중심 서사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레: 음, 게임 업계는 아직 한계가 많은 것 같아요. 구성원 3분의 1만 여자여도 ‘여초’라 할 만큼 남성이 주류거든요. 게임 대상층도 보통 남성이고 여성 혐오적 시선으로 게이머를 판단하는 일이 만연해요. 성 상품화는 당연하고, 예쁜 여성 유저가 모이면 남성 유저는 당연히 따라온다는 식의 시선이나 ‘여자는 이런 게임 안 해’와 같은 편견도 여전하죠. 변화한 점도 있어요. 업계 내 분위기에 힘들어하던 찰나,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떠올라 저도 1인 개발자로서 시도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여전히 왜 여성 관련 콘텐츠를 다루냐는 질문을 받곤 해요. 익명 커뮤니티 등에서 여성 업계 사람을 사상검증 하는 대화도 여전히 이뤄지죠. 일단은 버티는 게 제일 분명한 해결책인 것 같아요. 버티는 사람이 많아져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요.

 

여전히 여성으로서 힘든 것들은 존재한다. 어떤 것들을 느껴왔는지?

하: 다양성 만화라는 명목으로 지원사업을 받았는데 사업 본부에서 페미니즘을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보여요. 그래서 채식 위주로 부각했거든요.

뻥: 처음 지원사업 제출할 때는 궁서체로 ‘페미니즘’ 써놓은 거랑 다름없는 기획안을 제출했어요. 그런데 떨어졌거든요. 만화 내용이 낙태죄 폐지와 교내 성폭력에 대한 얘기인데, 결국 두 번째 시도에서 페미니즘 내용을 다 빼고 ‘산부인과 의사가 내리는 운명론적 결정’의 느낌으로 돌려 표현했어요. 

강: 영화도 제작 과정상 심사위원들하고 피드백을 많이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 팀이 발표한 낙태죄 이슈 등에 대해 백인 서구 남성이 ‘이건 이미 서구에서 다 지난 이슈'라고 부정적 피드백을 한 적이 있어요.

기자: 어쩌라고!

강: 그러니까요. 이런 상황을 마주치기도 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제작할 때도 영상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4번이나 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거죠. ‘페미니즘을 다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사적인 얘기일 뿐이라고 폄훼 당하는 일이 많잖아요. 아는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비슷하게 자기 이야기를 해도, 왜 남자가 만들면 청년 노동다큐이고 여자가 만들면 여자들의 사적인 다큐인지.

서: 근데, 여성이라고 해서 무언가 업계 내 극단적인 차별과 어려움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여성 서사를 창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찮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근데 페미니즘을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까지 견뎌야 해?’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없어요.

레: 저도 극적으로 무언가를 버티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주류가 아니니까 눈치 보는 상황이 항상 존재하죠. 예를 들어 전화할 때, 목소리가 여자니까 업계 사람이 당황해요. 지원사업을 심사받는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이 여성이라서 안 좋게 보일까 걱정하고. 자신에 대해 한 번 더 걱정하게 돼요. 여성 개발자가 만든 게임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어요. ‘내가 한 게임이 여자가 만든 것이냐’는 테러를 보면 그냥 여성 자체가 게임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씁쓸한 현실이죠.

하: 좀스럽고, 치사해요. 만화도 비슷하거든요. 남자들이 여자 작가 만화를 안 보려고 해요. 

 

이런 것들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 좋은 동료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게 제일 많이 도움이 됐거든요.

강: 소름 돋네요. 저도 동료집단 만들기라고 써놨는데 (웃음) 서로를 지지하는 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차피 욕할 사람은 안 보고 욕하잖아요!

뻥: 웹툰 작가들은 개인으로 작업하니까 ‘나 혼자 망해도 되니 이런 거 한 번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서: 저는 선배들을 보면서 힘을 얻어요. 최근 윤여정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탤런트 시절, 자기 건방지다고 내쫓던 분들 다 돌아가셨다고. (일동 웃음) 결국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레: 저도 살아남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게임 업계에서 여성 서사를 하겠다는 분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여성 개발자 모임은 꾸준히 있거든요. 서로의 용기로 버티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알려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여성 서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는?

레: 제가 여성 함장 리드의 ‘스타트렉 보이저’(Star Trek Voyager)(1995)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 옛날 작품도 이렇게 매력적인데 내 게임도 언젠가 그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장은 미미해 보여도 언젠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그러니까 작업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강: ‘우리는 매일매일’ 만들고 관객분들을 만나보니 생각보다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해 많이 모르시더라고요. 나는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단절감을 얘기해주셨는데, 계보의 차원에서 계속 만들고 싶어요. 여자들은 늘 처음 시작하고 내가 여길 개척해야 한다고 많이들 느끼잖아요. 여성의 작업은 이어지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뻥: 사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여자니까 여자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아? 의무감만으로 창작하기는 어렵지만 한 번쯤 해보면 여성 서사의 매력을 알 수 있어요. 여자가 여자 얘기하면 잘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다들 한 번쯤은 시도해보면 좋겠어요.

강: 맞아요, 남자들은 잘 모르는데 여자 얘기 되게 많이 하지 않나요. (웃음)

하: 그러니까요. 문제는 상상 속 여자를 그려낸 창작물을 보고 여자들이 학습한다는 거예요. 내가 틀린 게 아니고 이게 진짜 여자라고, 이렇게 해도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여자가 여자 얘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 전 더 나아가서 아예 여자들이 남자 얘기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주변 남성 군상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뻥: 리얼리즘이네요.

 

힘이 됐던 말이나 코멘트가 있었다면?

강: “백 편 만들어주세요”, “계속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늘 '계속해도 될까'라는 우려가 있거든요.

하: 웹툰을 그리면서도 저 자신을 의심해요. 내가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만화를 보고 채식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과 같이 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댓글 창에 있으면 신기하죠.

레: ‘가시가시’를 만들었을 때 한 이탈리아 분이 제 게임을 하고 우울증과 자폐증세가 호전됐다고 메일을 주셨어요. 그분이 결국 제 게임 이탈리아어 번역까지 제공하셨거든요. 그런 즐거운 일들이 있죠. 안 좋은 일도 많았어요. ‘가시가시’는 감정을 기록하는 행위를 게임 형태로 만든 앱이거든요. 여성의 경우 호르몬이 감정에도 영향을 주니까 관련 항목을 기본값으로 넣어놨어요. 그런데 보통 UX의 기본형은 남성이거든요. 제가 좀 다르게 행동했더니 “왜 월경이라는 단어를 넣었냐”, “기분 나쁘다”와 같은 해외 리뷰가 많더라고요. 전 오히려 ‘불쾌하셨다니 오히려 재밌네? 더 넣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화인을 비롯해 창작자를 꿈꾸는 많은 사람에게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 운동하세요! 창작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파먹는 일이거든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정신적으로 외로워져요. 운동하면 생각하지 않는 순간을 가질 수 있고 몸도 튼튼해지고 디스크도 안 터지잖아요 (일동 웃음) 그리고 작가 팁! 죽지 말자. 너무 힘들면 창작 말고 딴 거 하자. 인생 한 번뿐인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좋겠어요. 너무 힘들면 그만두자!

강: 창작을 하다 보면 잘난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비교하게 되고 내 작업이 부끄러워져요. 하지만 중요한 건 재능보다 용기라고 생각해요. 내놓을 수 있는 용기. 나아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창작에 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 전 조금 다른 얘기긴 한데 영어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1인 개발을 해보니 영어 능력에 따라서 접근 가능한 시장 규모 자체가 다르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데도, 작품을 어디에 가지고 나갈 때도 영어 능력에 따라 태도가 많이 변하는 거 같아요.

뻥: 친구 많이 사귀세요! 웹툰은 혼자 하는 작업이 많지만 내 생각에만 갇히지 않는 게 중요해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내가 느끼는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다고 보는 시선이 창작에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 많이 경험하세요. 나이가 들수록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닫혀가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것과 맞닿아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일을 할 때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지금 만드는 게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로 다가갈지 고려하는 것도 책임감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국극: 여러 사람이 배역을 분담하여 무대에서 연기하며 판소리 가락으로 대본을 얹어 부르는 음악극이다. 광복 직후 배역을 여성만으로 구성한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이 성행하였으나 1960년 이후 거의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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