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서사 만화를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장르, 이런 문법을 싫어한 게 아니라 남성서사에 이입을 못 했을 뿐이었구나’를 느껴요. 

-이유경(30·여·서울 중랑구)

웹툰이 달라지고 있다. 유희거리로만 생각됐던 웹툰은 이제 사회 변화를 담아내고 이끌고 있다.

전반적인 만화계에서 여성 중심의 서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시작된 지 어언 6년. 이제 자리웹툰들은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낙태죄, 가스라이팅, 더 나아가 아시안 여성 혐오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고도화되면서 여성의 외침은 여성주의 의제를 웹툰의 주제로 담아내며 예술의 영역까지 그 배경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린 웹툰계, 여성주의 서사의 기반으로

웹툰이 여성주의 서사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변화하게 된 것은 무엇의 영향일까. <한겨레신문> 이유진 기자는 칼럼 ‘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적대의 정체’에서 “2015년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불편한 용기’ 시위, 미투 운동의 확산 등 여성들의 목소리에 여성 만화가들은 발 빠르게 응답했다”고 말한다. 2015년을 기점으로 하는 ◆페미니즘 리부트가 여성주의 서사 유행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웹툰이라는 매체의 특성도 여성주의 서사가 ‘트렌드’로 자리잡는 과정을 거들었다. 만화평론가 조경숙씨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웹툰은 트렌드에 민감한 장르이기 때문에 작품과 현실이 상호작용”한다고 짚어낸다. 이러한 장르적 특징은 웹툰계가 다른 매체보다 빠르고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흐름을 수용하도록 이끌었다.

한편 독자들은 개방적이고 소통적인 웹의 특성에 힘입어 웹툰의 댓글 창을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공급자들의 변화로 번져 나갔다. <한겨레신문> 이주현 기자는 기사 ‘만화 같은 이야기? 여성웹툰 ‘현실’과 맞짱 뜨다’를 통해 “상업 영화 같은 대중문화산업에 비해 웹툰은 자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작가들이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쇄적으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들은 마침내 여성주의 서사에 대한 작가들의 의지와 적극성을 대폭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독자들은 여성주의 서사 만화에 뜨겁게 열광한다. 그들은 몰랐던 취향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남성이 당연하게 주인공이 되던 관습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몸소 변화하고 있었다. 안예진(뇌인지·20)씨는 ”만화와 독자들의 댓글을 보다 보면 수많은 대한민국 여성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느껴 많은 위로를 받는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기존의 웹툰 세계에서 이제 하나의 축으로서 당당히 자리잡은 여성주의 서사 만화는 이처럼 화면 너머 여성들에게 새로운 원동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본지는 만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독자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여성주의 서사 웹툰 3편을 소개한다.

 

여성 캐릭터가 보여주는 한국형 판타지의 가능성, ‘극락왕생’

출처='극락왕생' 1화
출처='극락왕생' 1화

연애라고 했을 때 떠올렸던 어떤 막연한 이미지들이

사실 평생 동안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역할 놀이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대사도 사회가 연애에 대해 주입한 통념은 하나의 역할놀이에 불과하다며 비판한다. 여성학 칼럼에나 등장할 법한 이 말은 웹툰 ‘극락왕생’ 속 주인공 자언의 고백이다.

독립출판플랫폼 딜리헙(dillyhub.com)에서 2018년부터 연재 중인 이 웹툰은 회차당 3300원이라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만에 매출 2억 원을 돌파하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으며 작품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서사의 가능성 또한 증명했다.

불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극락왕생’은 비가 오면 지하철에 나타나는 당산역 귀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승을 떠돌며 당산역 귀신으로 살고 있던 주인공 자언에게 어느 날 관음보살은 지장보살의 협시 도명을 시켜 그를 극락왕생 시킬 것을 명한다. 자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년을 돌려주겠다던 관음은 자언과 도명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부산으로 보내고, 둘은 귀신들을 도우며 자언을 극락왕생 시킬 방법을 찾아나간다.

‘극락왕생’에서 훌륭한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있다. 만화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다른 외관과 성격을 가진 여성이다. 큰 키와 듬직한 체형으로 늘 담배를 피우는 문수보살, 온몸에 화상 흉터가 남은 채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니는 도명, 비구니처럼 머리를 민 모습으로 등장하는 지옥도의 직원들까지. 여성 캐릭터의 화법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큰 코와 찢어진 눈, 각진 턱 등 다양한 외형의 스펙트럼 속에 놓여있는 캐릭터들을 ‘극락왕생'에서만큼은 맘껏 만날 수 있다.

‘극락왕생’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어떤 가치도 가질 수 있다. 무술에 능하지만 ‘섹시한 킬러’의 모습이 아니다. 끈기 있고 악착같이 인정 욕구를 드러내지만 아무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극락왕생'은 기존의 여성 캐릭터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까지 겸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주의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 작품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만화의 애독자인 정보현(경제·21)씨는 “창작자도 여성, 주인공도 여성, 주인공을 돕는 사람도 여성이기에 이입하기가 쉽다”며 “작가님이 보시는 세상에는 열정과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 내 인생을 제대로 계획해보자는 생각을 만들게 한다”고 평했다. 천편일률적인 여성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외형과 성격을 가지고 여성을 괴롭혀왔던 사회적 인식을 비판하는 캐릭터들의 등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여성들에게 힘이 된다.

 

프랑스에서 한국인 여성으로 살아남기, ‘데일리 프랑스’

출처='데일리 프랑스' 2화
출처='데일리 프랑스' 2화

이건 어떻게 보면 ‘실패한’ 유학 이야기지만,

이제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된 이야기입니다.

'데일리 프랑스'는 일상 웹툰이라기엔 다소 묵직한 한마디를 던지며 시작한다. 작가의 말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따금 불편하기도 한 자전적 유학기는 주인공 경선이 프랑스에서 한국인 여성으로서 생존해온 현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 놓는다.

“만화에서 작가가 겪은 모든 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불행하게 걸린 케이스가 아니다. 당장 뉴스를 틀어도, 인터넷 기사를 클릭해도 쏟아져 나오는 우리의 일상이었다.” 

독자 이서영(27·여·대구 달서구)씨의 말처럼, 경선이 들려주는 프랑스 유학기는 한국 여성들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과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를 오롯이 피해자인 여성에게 지우는 사회까지.

작중 경선은 남자친구인 ‘너'에게 그와 있을 때는 아무도 자신에게 ◆캣콜링(Catcalling) 하지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너’는 "그럼 나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네"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경선은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의 소유일 때는 안 건드리구나. 그 감각이 기분 나쁘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더해 아시아인이기에 잇따라 오는 인종 차별은 담담한 어조로 서술되지만, 독자는 이를 통해 다름을 향한 집단의 배타성 그리고 일상에서 느껴지는 권력의 불균형을 느끼게 된다.

'데일리 프랑스'는 이와 더불어 약자로 내몰린 경선을 보듬는 여성들의 따뜻한 연대도 조명한다. 데이트 폭력, 성추행 경험에 괴로워하는 서로에게 힐난이 아닌 묵묵한 위로와 지지를 건네는 것의 소중함을, 작가는 웹툰을 통해 전달한다.

 

‘일부’라는 변명의 졸렬함, ‘성경의 역사’

출처='성경의 역사' 3화
출처='성경의 역사' 3화

성경은 거절에 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을 쉬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역사'는 주인공인 성경이 자신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일대기이다. 만화는 재수생이던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타고난 성격에 더해 참는 것이 제일이라는 어린 시절 교육의 영향으로 단호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학원 강사는 성경이 학생임에도 성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연애 대상으로 여겨 접근해온다. 사건은 성경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일단락되지만, 학과 내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마저도 성경을 가만두지 않는다. 작가는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1020 여성이 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공격 그리고 이에 대한 지각 없는 일부 남성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경의 역사’의 독특한 점은 만화 속 등장인물들을 성별에 따라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성들은 남성들의 방식으로, 여성들은 여성들의 방식으로 유약한 성경을 오해하고 몰아붙인다. 성경이 다니던 학원의 남성 원장은 성경을 성추행하려 한 강사를 두둔하고, 남성 동기들은 성경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감정을 폭력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꼬리 쳤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를 미워하는 여성 동기들과 이를 이용해 악의적으로 소문을 내는 여성 캐릭터도 존재한다. 더불어 '성경의 역사'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력자로도 남성과 여성 캐릭터를 모두 배치하며 성별을 넘나드는 선과 악을 그려낸다. 이는 가부장제로부터 기인하는 여성 혐오와 남성 문화의 동조자를 단순히 성별로 구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성경의 역사’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남성 혐오 작품'이라는 꼬리표로도 화제가 됐다. 31화에서 불법 촬영 가해자를 비판하는 여성 캐릭터의 대사 “그 사진 뿌린 새끼가 대학 와서 만난 남친이래! 아 미친… 남자들 제발 죽었으면…”이 모든 남성을 일반화한다며 ◆별점 테러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웹툰이 완결된 지금도 ‘성경의 역사' 연관검색어에는 ‘페미'와 ‘남혐'이 붙어 있으며 평균 별점은 7.89점에 머무른다. 테러당한 만화의 댓글 창과 별점은 ‘모든 남성'은 그렇지 않다며 변명하던 집단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듯 보인다.

 

낙태죄가 합헌이 된다면? ‘곤(GONE)’

출처='곤(GONE)' 1화
출처='곤(GONE)' 1화

아이를 낳는 일. 참 쉽지 않은 일. 임신을 하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중지하는 것도,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내가 결정해야 할 일.

‘곤(GONE)’은 낙태죄가 헌법 합치 판결을 받았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시작된다. 낙태 수술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1953년 이후 낙태한 여성들은 ◆IAT 검사로 모두 색출돼 감옥에 가게 된 것. 손만 넣으면 낙태 여부를 알 수 있는 IAT 키트가 여성들의 숨통을 죄어 온다. 만화는 낙태죄 처벌로 여성이 사라져 가는(Gone) 세상을 그린다.

이야기는 ‘노씨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오래전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낙태 경험이 있는 엄마, 엄마의 구속으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지자 남편에게 육아 휴직을 권유하는 첫째 딸 민형. ◆딩크족(DINK族)이었으나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해 낙태를 고민 중인 둘째 딸 민아, 그리고 여자친구 샛별과 불법 임신 중절 수술 병원을 찾아다니는 셋째 아들 민태. ‘곤(GONE)’은 각기 다른 사정을 안고 낙태라는 숙제 앞에 놓인 인물들을 담담히 그려낸다.

‘곤(GONE)’은 낙태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여성에게 얼마나 불합리한지 드러낸다. 부성 우선주의, 임신·출산 여성의 경력 단절, 독박 육아, 그리고 남성의 육아 휴직까지. 이 만화가 담고 있는 성차별 문제들은 일상적이며 포괄적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독자들은 서서히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낙태죄는 왜 여성만을 겨냥할까? 나아가 임신과 출산은 왜 여자들만의 일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남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지만, 사회는 이를 함구하고 있다. 그리고 ‘곤(GONE)’은 이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 앞에서 극명해지는 여성과 남성의 온도 차를 현실적으로 포착해낸다.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벌은 여자가 받고 성(姓)은 남자가 받고?” 노민아와 제갈경 부부가 자식에게 노씨 성을 물려주는 일로 대립하자 현숙이 건네는 한 마디는 오늘날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을 꿰뚫는다.

2019년 4월 낙태죄는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개정 시한이었던 2020년 12월31일까지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낙태죄는 결국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하다. 낙태죄 소멸은 임신중지에 따른 상담과 의료 절차를 규정하는 법안마저 공백으로 남겼고, 아직도 많은 여성들은 물밑에서 임신 중단 절차를 찾아다닌다. 낙태 여성을 향한 사회적 낙인도 그대로다. 독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곤(GONE)’의 장르가 정말 판타지인지 되묻게 만든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서사

모든 여성주의 서사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화는 창작물이기에 과장과 축소의 과정을 거쳐 재탄생한 현실이고, 사회를 비추는 하나의 예술이므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완벽히 반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성주의 작품들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많은 여성들에게 안식처이자 원동력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는 창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안씨는 “특정 장르를 제외하면 남성 서사, 남성 작가가 지배적인 만화계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주의 서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도전인지 알고 있다”며 “여성주의 서사로 성공한 선례가 남으면 더 많은 작가가 여성서사에 도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기에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더 나아가 여자들을 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리부트: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기점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촉발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

◆캣콜링(Catcalling): 남성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추근거리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 성희롱적인 행동 또는 언어적 표현의 일종.

◆IAT 검사: Induced Abortion Test의 약자. 웹툰 ‘곤(GONE)’에 등장하는 인공 낙태 테스트를 일컫는 말.

◆딩크족(DINK族):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 Double Income No Kid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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