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여성을 잇는 ‘벡델초이스10’ 선정작 4편을 만나다

1일부터 7일, 성평등주간을 맞이해 한국영화감독조합(DGK·Directors Guild of Korea)은 ‘벡델초이스10’을 발표했다. 벡델초이스10이란 ‘벡델테스트'의 3가지 조건과 DGK가 세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이다.

벡델테스트는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1985년 고안한 것으로, 영화의 성평등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다음 조건들을 모두 갖춰야 한다.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그 대화의 주제가 남자 이외의 것인가.’ 최소한의 기준만을 제시하는 이 테스트는 약 30년간 영화의 성평등 여부를 판가름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자리 잡아 왔다. 이는 벡델테스트가 영화 속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과 더불어 영화계의 남성 카르텔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수치화했기 때문이다.

한편 벡델초이스10 선정을 위해 DGK가 2020년 추가한 심사 기준은 네 가지다. 감독·제작자·시나리오 작가·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 비중이 동등할 것, 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본지는 선정작 중 여성 연대를 다룬 영화 4편을 소개한다.

 

우리집 그리고 너네집을 지키려는 아이들의 고군분투,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9)

“애한테 왜 그래!”(아빠) “애니까 그러지!”(엄마)

속뜻은 보통 다음과 같다. 어려서 모를 거야. 아직 애인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때로는 어른들보다 용기 있고 대담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집’의 하나(김나연)와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이 그렇다.

초등학교 5학년 하나는 걱정이 태산 같다. 눈만 마주치면 다투는 부모님이 이제는 이혼까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갈라서기 전에 우리 모두 화목했던 그때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집을 지키려는 아이들이 또 있다. 같은 동네의 유미, 유진 자매다. 부모님의 사정으로 이사를 자주 다니는 유미, 유진은 또다시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부모님마저 지방 출장으로 없는 상황. 집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두 자매밖에 없다.

그렇게 하나와 유미, 유진 삼총사가 결성된다. 아이들은 서로를 위로하기도,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집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집’은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린다.

영화 '우리집'(2019) 출처=네이버영화

영화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을 화면에 담고, 아이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바를 그대로 전한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더 이상 예쁨 받기만 하는 ‘객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진취하는 아이들의 역동을 지켜보며, 관객은 무심코 어린이들을 ‘애 취급’하던 지난 날을 반성하게 된다.

우리집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실수하기도,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저앉지 않는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어낸 뒤 무릎 훌훌 털며 일어선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꽉 붙든 채 다시 나아간다. 그게 ‘우리집’의 아이들이 연대하고 성장하는 방법이다. 어떤가. 이들을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어른보다 어른다운 미성년의 성장 스토리, 김윤석 감독의 ‘미성년’(2018)

“축하한다? 너 때문에 우리 집은 이제 지옥이다.”(주리)

주리(김혜준)의 아빠인 대원(김윤석)이 바람을 핀다. 상대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윤아(박세진)의 엄마 미희(김소진). 주리는 윤아를 찾아가고, 한참 말다툼을 하던 중 윤아가 주리의 휴대폰을 빼앗아 든다. 그러더니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어 주리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리고야 만다. 접점 하나 없던 둘은 그렇게 한 배를 타게 된다.

영화 ‘미성년’(2018) 출처=네이버영화
영화 ‘미성년’(2018) 출처=네이버영화

‘미성년’(2019)은 얼핏 보면 뻔한 불륜 영화 같다. ‘막장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처럼 여겨지는 한국에서 불륜이란 소재는 이젠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흔하다. 그러나 영화는 불륜을 저지른 어른들이 아닌 그들의 무고한 자녀들로 초점을 옮기고, 그들의 시선으로 불륜을 조망하며 클리셰를 비튼다.

한편 주리와 윤아는 이제 그들의 부모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대원과 미희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난 것. 서로에게 상처 주기 바쁜 어른들을 대신해, 주리와 윤아는 아기에게 책임감과 애정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한껏 날 서 있던 둘 사이도 어느새 느슨해져 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의문이 든다. 과연 누가 성년이고, 누가 미성년인 걸까? 영화는 껍데기만 성인인 ‘어른애’들과, 어른들이 저지른 과오를 딛고 성년의 단계로 한 발 나아가려 하는 ‘애어른’들을 대조적으로 비춘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속의 미성숙한 어른들마저도 결코 미워할 순 없다. 범람하는 감정을 견디다 못한 영주가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미희가 ‘지금껏 내 인생이 없었다’고 호소하는 모습은 아직 다 자라지도 못했는데 ‘어른’의 영역으로 등 떠밀리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내 나이 땐 자기가 이런 짓을 할 줄 몰랐겠지? 니네 아빠도. 나중에 나이 들어서 바람 피우고 막 그래야지, 뭐 그런 생각 안 했을 거 아냐.”(윤아)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윤아의 대사다. 주리와 윤아는 이내 부모에 대한 실망과 원망을 거둔다. 그리고 그쯤에서 부모를 납득한다. 어른들도 그들만의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미성년과 성년을 가르는 기로에서, 둘은 그렇게 한 뼘 성장한다.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커리어우먼’이라는 꿈을 이뤘다는 행복감도 잠시, 자영(고아성)을 비롯한 삼진그룹 여직원들이 마주한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높다. 업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 봐야 그들은 몇 년째 말단 직원 신세다. 단지 그들이 여자고, 상고 출신이라서다.

그러던 중 고졸 사원들을 대상으로 영어 토익반이 개설된다. ‘600점 이상 받으면 대리 진급!’ 누군가는 3달 안에 어떻게 600점을 넘기냐며 푸념하지만, 여직원들을 희망을 품고 열심히 토익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당시의 수많은 ‘미스김’들이 묵묵히 참고 견뎌야 했던 직장 내 성차별과 노동 문제를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회사 공장에 방문한 자영은 폐수가 하천으로 콸콸 쏟아지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다. 자영은 이 사건을 외면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한 작은 ‘오지랖’을 품고 자영은 유나(이솜), 보람(박혜수)과 함께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출처=네이버영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출처=네이버영화

이종필 감독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영웅 서사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히어로물’이라 일컫는, 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고한 시민을 구해내는 류의 영화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이들이 힘을 모아 일궈낸 승리는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고 원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착한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승리하는 속 시원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며,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I know, I am tiny tiny person.”(자영)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실패한 자영이 가만히 벽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자영이 숨죽여 바라보던 건 벽을 타고 오르는 개미였다. 처음엔 개미 한 마리만이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곧이어 여러 마리의 개미가 무리 지어 벽을 오른다. 어쩌면 이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비록 우리 한 명 한 명은 작은 개미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에겐 연대할 수 있는 서로가 있다는 것 말이다.

 

절망의 끝에서 조우한 세 여성,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2020)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휴직, 남편의 오랜 불륜. 연이어 찾아온 불행들이 경찰 현수(김혜수)를 덮친다. 직장에서는 남편이 낸 거짓 소문만이 현수를 대변할 뿐이다. 현수는 숨 막히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 복직을 결심한다. 그가 복직을 위해 맡게 된 일은 한 소녀가 실종된 사건. 그 속에서 현수는 자신과 많이 닮아 있는 소녀 세진(노정의)을 만난다.

현수는 세진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고, 그들 자신의 세상에서 존재를 잃은 채 타자로 밀려난 모습을. 그래서 현수는 자신만큼은 세진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영화에는 세진을 끝까지 지켜준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한다. 바로 순천댁(이정은)이다. 사고로 전신마비 조카를 돌보며 외롭게 살아가는 순천댁에게도 자신만의 아픔이 있다. 그러나 순천댁은 결코 세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외로이 남겨진 세진에게 곁을 내준다. 상처 입은 그들은 침묵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가족보다도 끈끈하고 애틋한 연대를 이룬다.

영화 ‘내가 죽던 날’(2020) 출처=네이버영화
영화 ‘내가 죽던 날’(2020) 출처=네이버영화

“나가서 우리 몫까지 살아. 아무도 안 구해줘. 네가 너를 구해야지.”(순천댁)

영화가 끝나갈 무렵 순천댁이 세진에게 말한다. 이 말은 순천댁이 세진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애정 어린 조언이다. 스크린 너머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한 마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절망 속을 헤매던 세진이 다시 일어나 마침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주저 않고 따뜻한 손길을 내민 순천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타자들에게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서로가 있기에 그들은 외롭지 않다. 영화는 추리물이라는 장르적 문법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약자들과 그들 간의 연대를 담담히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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