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는 여자를 별나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0 한·일 게임 이용자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여성의 게임 이용률은 39.4%에 불과했다.

하지만 게임은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2021년 게임 이용조사에서 여성의 게임 이용률은 68.5%를 기록하며 2010년에 비해 1.7배 이상 증가했다. 남성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게임 세계에 진입한 여성들은 왜곡된 성 관념 재생산이라는 관습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 있다.

 

여성 게임 이용률은 늘었지만, 변화는 글쎄

게이밍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게임 캐릭터의 절반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 게임 연구 단체 Feminist Frequency가 2015년부터 ◆E3에 등장한 신작 게임 주인공 성비를 분석한 결과, 남성 캐릭터는 매년 21%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2019년까지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10%도 넘지 못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공급의 결과다.

이렇게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들어진 여성 캐릭터마저도 캐릭터 이전에 ‘여성’으로 비친다. 여성 캐릭터의 외형은 주로 사회적 여성성에 부합하는 10대, 20대의 미형에 집중된다. 피부색, 체형, 얼굴 생김새 등 다양한 외적 요소부터 이를 묘사하는 방식까지, 게임은 여성을 향한 관습적 시선을 그대로 답습한다. 하나의 전시물로써 여성 캐릭터는 부자연스러운 행동, 맥락 없는 노출을 일삼으며 눈요기로 역할 한다.

여성의 노출에 대한 집착은 의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갑옷을 입을수록 강해지는 남성 캐릭터에 비해, 여성 캐릭터는 진화할수록 헐벗은 모습을 띤다. 이는 성인용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이용가인 ‘포켓몬스터 소드·실드’에서 같은 세트의 옷을 입혀도 여성 캐릭터에게는 크롭탑이, 남성 캐릭터에게는 반팔 티셔츠가 주어진다. 게임의 주인공이 어린이임에도 노출에 대한 강조는 여전했다.

신체의 세부적인 움직임을 지정할 수 있는 게임에서는 가슴이나 엉덩이 움직임이 여성 캐릭터에게만 부여되기도 한다. 가슴 흔들림을 일컫는 ‘가슴 모핑(morphing)’과 같은 단어가 보편화한 것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반증한다.

눈요기로 전락한 여성 캐릭터는 내적인 면에서도 미흡하다. 서사를 지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 캐릭터는 붙잡힌 여인(Damsel in Distress) 모티프의 일환이 되거나 모성, 로맨스와 같이 여성적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동기를 공유하며 남성의 부차적 존재에 머무른다. ㄱ(호크마·21)씨는 이에 대해 “(여성 캐릭터의) 명확한 동기가 제시되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예쁘다는 이유로 캐릭터를 만들어낸 듯하다”라고 덧붙였다.

 

다양하게, 더 많이… 여성 캐릭터의 다원화

긴 시간에 걸쳐 굳어진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게임계에도 변화의 물결은 서서히 일고 있다. 이전보다 많은 여성이 게임을 즐기게 되면서 게임 속 여성의 부재나 왜곡된 여성성 묘사에 대한 비판 또한 거세졌다. 게임 산업 내에서 다양성·포용성의 중요성이 대두된 것도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이러한 흐름은 게임 콘텐츠 자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미인형 여성 캐릭터나 특정 신체 부위만 부각된 모습이 아닌, 자연스럽고 다양한 외양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근육질의 ‘오버워치(Overwatch)’ 자리야, 짧은 옷을 벗어 던지고 실용적인 의상으로 갈아입은 ‘툼 레이더(Tomb Raider)’의 라라 크로프트 등이 그 사례다. 이와 더불어 암묵적으로 배제되던 노인 여성의 모습이 ‘오버워치’의 아나로 재현되며 게임 속 여성 캐릭터가 다원화되고 있음이 증명됐다. 

여성 캐릭터들의 서사 및 게임상 비중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2016년 발매된 ‘미러스 엣지 카탈리스트(Mirror’s Edge Catalyst)’의 페이스 코너스는 동양계 여성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2020년 출시작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Assassin’s Creed: Valhalla)’에서도 이용자는 바이킹계 여성 전사 에이보르를 주인공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노유진(사범·20)씨는 “여성을 다루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하고 멋진 여성만을 조명하는 것 또한 새로운 고정관념이 될 수 있다”며 전반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전쟁을 막기 위한 여성들의 의기투합, '풀 메탈 퓨리즈'

(Full Metal Furies)

출처='풀 메탈 퓨리즈' 게임 화면
출처='풀 메탈 퓨리즈' 게임 화면

좋아, 아가씨들… 오늘부로 퓨리즈가 전쟁에 참전한다!

세계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죽었다. 왕관의 자리가 비자 타이탄들은 이를 찬탈하기 위해 백 년 동안 전쟁을 일으킨다. 세상이 잿더미가 돼 어쩔 수 없이 이른 휴전 상태, 살아남은 타이탄들은 다음 전쟁을 위해 병력을 끌어모은다.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텐데. 어떡하지? 그렇게 세계를 구할 용사, 퓨리즈가 나타난다.

풀 메탈 퓨리즈는 도트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로그라이크 액션 어드벤쳐다. 방패를 들고 선봉에 나서는 탱커 트리스, 도끼를 휘두르며 카운터 공격으로 적을 휘젓는 파이터(단거리 딜러) 알렉스, 총과 구르기를 이용해 날렵하게 공격을 날리는 엔지니어(원거리 딜러) 에린 그리고 강력한 한 방을 노리는 스나이퍼 메그까지. 게임 플레이 내내 이용자들은 퓨리즈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새로운 절대권력이 되려는 타이탄들과 맞서 싸운다.

게임 속 캐릭터들은 신체를 과도하게 노출하지도, 왜곡된 성 관념을 재생산하는 복장을 하고 있지도 않다. 탱커는 갑옷을, 엔지니어는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 또한 여느 남성 캐릭터와 다를 것 없다. 전투를 위해 거칠고 강인하며 함께 싸울 때 더욱 강력하다. 일련의 과정에서 ‘여성이라서’는 없다. 각자가 필요한 모습을 하고 개연성 있는 성격과 동기를 갖는 캐릭터들에게 플레이어는 쉽게 이입하고 또 협동한다. 거대한 타이탄 앞에 퓨리즈가 맞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탑 속 공주에서 운명의 개척자로,

'젤다의 전설: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출처=닌텐도(Nintendo) 공식 홈페이지

가르쳐주세요… 저에겐 무엇이 부족한 거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련에 정진하며, 공학으로 부족한 점을 메워 나간다. 여성 캐릭터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이 서사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야생의 숨결)에 등장하는 주인공 젤다 공주의 이야기다.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이 작품은 3인칭 ◆오픈 월드 형 비디오 게임으로 용사 링크의 모험을 담아내고 있다.

젤다의 처우가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시리즈 초기, 젤다는 탑에 갇힌 공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게임 초반부에 납치돼 용사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기다리다 결말 부분에 잠시 등장한다. 하지만 시대를 거치며 젤다는 보다 다양한 특성과 서사를 부여받았다. 링크의 소꿉친구로도, 짝사랑 대상으로도 등장하며 변화하는 젤다의 모습은 ‘야생의 숨결’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젤다의 부족함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다른 남성 주인공을 사랑해서라거나 그를 보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여신의 신성한 힘이 자신에게 깃들 것이라는 신탁보다 부족한 자신의 능력에 좌절을 느끼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극복해 나간다. 여성 캐릭터가 결함을 지닌다는 것은 기존의 게임계 경향과는 반대되는 시도이다. 여성 캐릭터는 물리적인 수가 적은 탓에 제작자가 원하는 모든 가치를 지녀야 했기 때문이다. 결점을 통해 성장하는 것. ‘야생의 숨결’이 이뤄낸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도전이다.

젤다의 능력이 주인공 링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여신의 후계자인 젤다의 성스러운 힘 없이는 링크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적을 완벽히 물리칠 수 없다. 젤다는, 남성 주인공 링크를 위해 부차적으로 등장하거나 그와의 관계 안에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독립변수로서 존재한다.

 

여성으로 새로 쓰는 영웅 서사,
'호라이즌 제로 던' (Horizon Zero Dawn)

출처=게릴라 게임즈(Guerrilla Games) 공식 홈페이지

천애 고아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파헤치고자 긴 여정을 떠난다. 게임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의 스토리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구조대로 흘러가지만, 주인공 에일로이가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로 색다르게 다가온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독창적인 세계관을 자랑하는 3인칭 오픈 월드 형 액션 어드벤처 ◆RPG다. 게임의 배경은 약 1000년 후. 지구가 한 차례 멸망한 후 인류는 소생했지만, 과거의 지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든 것이 원초로 돌아갔다는 설정이다. 게임 세계에는 알 수 없는 유적지와 기계 짐승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원시적인 환경에 AI와 로봇 등의 요소를 더해 게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주인공 에일로이는 어머니를 숭상하는 ‘노라 부족’의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로 추방자 취급을 당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의문을 품은 채 강인한 용사로 자라나고, 마침내 대족장으로부터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추구자’로 임명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에일로이가 되어 출생의 비밀과 그를 둘러싼 거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위해 추구자로서 모험을 이끌어 나간다.

게임에서는 주인공 외에도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노라 부족의 대족장 티어사, 전투 족장 소나, 그리고 태양왕의 수호대장 에르사까지. 이들 모두는 무리를 이끄는 여성 지도자로 등장한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강하고 능동적인 여성을 게임 속에 다수 등장 시켜 여성 캐릭터를 둘러싼 편견을 통쾌하게 깨부순다.

스토리가 진행되며 에일로이는 자신이 인류를, 나아가 생태계를 구할 운명임을 깨닫고 용맹하게 싸운다. 남성 주인공이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게임계에서, 여성 전사로서 영웅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에일로이의 존재는 여성 주연 액션 게임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E3: 미국 LA의 LA 컨벤션 센터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규모의 국제 게임 전시회
◆로그라이크(Rogue-like): 랜덤하게 생성되는 게임의 환경, 턴 방식의 게임 플레이, 플레이어 캐릭터의 영속적 죽음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게임을 의미한다.
◆오픈 월드: 높은 자유도를 기반으로 플레이의 제약이 거의 없는 게임을 가리킨다.
◆RPG: Role-Playing Game의 약자. 롤플레잉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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