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 4년, 교수로 12년... 대입 본고사 때 처음 만난 나의 학관

학관이 6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화의 상징적 건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학관. 지금의 학관 모습은 이제 기억속에 남게 됐다. 재학생, 교수, 졸업생, 경비원이 본지에 학관을 추억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들의 아쉬운 마음을 수기로 전한다.  이번 편은 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글이다. (편집자주)

 

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학관은 싫지도 좋지도 않은 건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와 학관은 많이 연결되어 있다. 입학 후 첫날, 나는 스스로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2층 강의실을 향해 갔다. 시간이 밭아서 서둘렀는데, 아뿔사, 3층이다. 내가 너무 코를 박고 걸었나?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어라? 1층이네? 난 다시 올라갔다. 2층을 놓치지 않으려고 유념하며 비탈진 경사를 올랐는데- 이게 웬일? 다시 3층이다. 그리고 다시 1층…. 난 첫날부터 지각을 하고 말았다.

물론 10분쯤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움직였으면 좋았겠지만, 이날의 지각은 내 탓만은 아니다. 학관 건물 중 설계가 이렇게 된 쪽이 있을 줄이야…. 이대 다니는 언니도 없는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학관은 이렇게 독특한 설계로 된 건물이다.

내게 중요한 깨우침을 준 또 하나의 독특한 학관 설계가 있다. 학관 3층에서 포스코관을 향해 난 문으로 나가려면 많이들 통과하는 화장실이 있다. 이 화장실은 앞뒤가 열려 있어 3층에서도 들어가고, 그리고 계곡 같은 느낌의 복도가 있는 대형 강의실 쪽에서도 접근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화장실을 화장실이자 밖으로 나가는 통로로 이용한다. 화장실이자 길인 공간. 가려져야겠지만 열린 공간이다. 지름길이 있는데 하필 돌아서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야 나오는 길을 굳이 선택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다 다녀버리고 그러고 난 후의 언젠가 나는 지도교수 선생님과 함께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들고 포관 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날은 날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선생님이 멈칫 하시더니 안 따라오시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우리 선생님이 마실 것을 들고 화장실을 관통하기가 싫으신가 보다. 그래서 난 또록하게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여기 깨끗해요,라고 말하면서 선생님께 어서 오시라고 확신에 찬 얼굴로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여전히 그대로 서 계시는 거다. 이런- 너무 체체하시군. 잠시만 싹- 지나가면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청결을 따지시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재차 독촉을 했다. 그러면서 정 거리끼시면 계단으로 가죠,라고 말씀드리려는데 선생님께서 흐-읍 하시는 것 같더니 아주 빠른 걸음으로 휙하고 지나가셨다. 뭘 이렇게까지나 빨리? 난 얼른 뒤따라가며 말씀드렸다. 거봐요, 선생님. 커피 들고 지나갈 만하죠?라고 즐거이 무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과 함께 어딘가로 갔다. 좀 걸어갔는데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다. 아차차, 선생님은 남자지!

맞다. 아메리카노 들고 지나가기에 더럽고 안 더럽고가 문제가 아니셨던 게다. 나는 그때 늘 지나다니던 내 생각만 하고 선생님이 남자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간과해 버렸다.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생각하며 뒤늦게 죄송했지만 이 말을 입 밖에 내서 그날을 다시 환기하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더 불편하실 것 같아 혼자 매우 죄송해하며 말았던 일이 있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다수에 속하게 되면 아무런 의도 없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학관의 독특한 설계 덕분에 얻게 된 통찰로, 지금까지도 내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된 사건이다.

나는 지금 1980년 이후로 내가 몸담고, 배우고, 익히고, 일하고, 졸고, 멍때리고, 탈춤 추던 학관의 여러 공간들을 떠올려 본다. 학관 앞 십자로에 심겼던 사루비아 꽃들을 기억한다. 어느 지리한 여름 끝자락, 2학기 등록금을 내고 학관으로 가다가 한 줄기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간 또 하나의 깨달음.

그날의 깨달음으로 나는 더 이상 수업시간에 졸거나 자지 않게 되었다. 깨달음은 이렇게 생활의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와서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가 보다. 나는 어찌하여 대학교 2학년 그 해 여름 더 이상 수업시간에 졸지 않게 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까? 내가 알던 학관이 사라지려는 지금 이 순간은 그것도 학관 앞 십자로의 사루비아 꽃밭 덕분이라고 하고 싶다.

학관 4층 한 벽면이 다 창으로 된 강의실에서 선생님이 강의하시는 음성을 배음으로 하여 하염없이 바라보던 봄 나뭇가지들이 마음에 아른거린다. 무슨 쓸모인지 모를 학관의 공간들은 지금도 안녕할까? 효율적이지 않다고 할지도 모르는, 꼬불꼬불 미로 같은 학관의 설계는 그 자체로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거치면서 속을 다 알 것만 같이 변해버릴지도 모르는 학관 생각에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쉽다. 현대적 느낌의 건물은 생선가시처럼 구조를 알 것만 같은데 지금 이 건물은 당최 어떻게 된 것인지 그 구조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1학년 신입생들이 이 구조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학관의 매력이다. 오죽하면 이대 학관은 이상이 설계한 건물이라는 소문이 돌았을까?

아쉽고 좀 슬픈 마음이 된다. 내가 아는 학관만 해도 40년 세월이다. 어딘가 찾아보면 학관의 더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처음 만난 학관 1층, 나는 그곳에서 대입 본고사를 치렀다. 겨울이었는데 창가 옆 라디에이터에서는 스팀이 픽픽 뿜뿜 쉬지 않아 지나칠 정도로 더운 공기가 나왔고 그때 시험 감독이셨던 이어령 선생님은 비로도(꼭 이렇게 쓰고 싶다) 재킷을 입고 계셨다. 어두운 보라쯤 되는 색이었을까?

내게 학관은 40년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래되어 헐거워져 바람이 새어 들어오던, 학관 4층의 고색창연한 디자인의 창틀을 기억한다. 안전 문제로, 보온 문제로 그 창틀은 몇 년 전 생을 마쳤다. 올훼스의 창이 아니어도 너무나 낭만적이었던 창틀이었는데 이젠 기능 좋은 창문으로 바뀌었고, 따듯함을 얻었지만 이야기성은 희미해졌다.

얼마나 많은 이대생들이 학관에서 강의를 듣고 간식을 먹고 커피 자판기 앞에 줄을 섰을까? 이제 며칠 뒤면 내가 기억하는 학관은 사라진다. 기공식을 하며 학관의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도 있지만, 그리고 이미 어제 그 행사는 치러졌지만 나는 이 학관의 모습이 변하기 전, 지금 그대로의 학관에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싶다. 코로나만 아니었더라면 학관에 추억이 있는 모든 이들, 나 같은 선생, 동창들 그리고 지금 학생들까지도 모두 불러 지신밟기 하듯 순례하듯 학관의 여러 공간들을 걸어서 빙 둘러보는 기념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쉽다. 낡은 채로 정들었고 좀 냉기가 느껴졌어도 풍부했고 깊고 재미있었던 나의 학관, 안녕! 

조혜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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