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관이 6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화의 상징적 건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학관. 지금의 학관 모습은 이제 기억속에 남게 됐다. 재학생, 교수, 졸업생, 경비원이 본지에 학관을 추억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들의 아쉬운 마음을 수기로 전한다.  이번 편에는 학관 구석구석에 얽힌 추억을 간직한 졸업생, 재학생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편집자주)

 

교실 하나 건너, 3층 소파 하나 두고, 우리는 '하나'였다

김유리(중문·20년졸)씨
김유리(중문·20년졸)씨

오래 만난 인연과 헤어지면 예상외로 그 충격이 바로 다가오진 않는다. 그런데 생각이 많아지는 특정한 때가 닥치면 돌연 그 얼굴이나 그 장소가 보름달처럼 환하게 떠오르곤 한다. 과장을 좀 보태, 학관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학관 3층 소파와 정수기 앞 공간이 가장 좋았다. 학관에서 안 가본 공간이 거의 없지만 첫 만남이 대개 3층에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파에선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 타과 친구들과 무언가를 함께 했다. 소파가 없었을 적엔 수업 시작 전후로 정수기 앞에서 서성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소파가 생긴 후에도 이 앞을 지나가던 친구들을 만나거나 교수님들을 뵈면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3층이냐 물으시면 3층에 주로 ‘서식’했기 때문이다. 3층으로 말할 것 같으면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신비의 오르막이 있었고, 인문관으로 바로 연결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대학원 진학 후 머물렀던 중문과 연구실이 있었다. 한마디로 3층에서 소통을 참 많이 해서 이곳과 가장 끈끈하다. 부평초 같던 내가 어딘가에 붙어있을 수 있어 좋았다. “3층에 가면…”이란 설렘이 있었다.

전체 사이버 강의 학기 직전인 2019년 하반기, 중문과 전공 수업들은 대부분 2층에서 열렸다. 학관 206호에서 이재돈 교수님의 <중국 언어와 대중문화>란 전공 수업을 들었는데, 친한 동기들이 대부분 205호에서 다른 과목을 들었다. 이 수업이 시작하기 전 포스코관에서 하산하여 먼 길을 내려왔는데도, 쉬는 시간 15분 중 남는 5분을 할애해 친구들 있는 205호에 들어가 같이 수다 떠는 게 참 짜릿했다.

“교수님 들어오신다!”하고 서둘러 뒷문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할 얘기가 뭐 그리 많았는지 수업이 끝나고도 만났다. 다 가지도 않았던 하루 중에서도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다 같이 밥을 먹든, 공부하러 가든 했다. 이와 같은 5분의 재잘거림이 학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나만 더 말할 수 있다면 학관 1층 오르막에 붙어있던 대자보들. 학관이 살아있음을 매번 느끼게 해주었다.

학관이 재단장을 준비중임은 얼핏 들어 알았지만, “왜” 이 곳을 리모델링해야 하는지 숙지하지 못해 당황한 마음이 더 컸다. 노후한 시설 등의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잘 설득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무지함 탓이라면 미리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여하튼 시공날짜가 정해진 후에야 리모델링에 탕탕탕 선언이 내려짐을 안 뒤, 결정된 사항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으므로 생각을 정리했다. 또 리모델링으로 즐거워하는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도 보았다. 나에겐 과거의 추억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겐 후에 더 좋은 현재로 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모델링 전 최대한 학관의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찍어두었다.

교실 하나 건너, 층수 하나 위에, 3층 소파 하나 두고 앞에 앉아, 우리는 ‘하나’였는데 졸업 전까지 그 공간에 가지 못하는 게 이제서야 좀 슬프다. 이곳에서 많은 사랑을 했다.

김유리(중문·20년졸) 동문

 

졸업한 지 48년, 학관 재건축에 기부한 이유

학교에서 최근 학관 기부 관련 사항을 메시지로 받았다. 지난 동창회를 통해 소소하게 기부를 한 것 때문에 온 듯하다. 적은 돈이지만 내 돈이 밀알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번 학관 공사에도 기부했다.

나에게 이화는 지금까지도 내 자부심이다. 이화를 다녔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었으며 이화 덕분에 아름다운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 젊은 날의 가장 좋은 시간을 좋은 학교에서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당시 우리나라를 주도적으로 이끈 문인들에게 교육을 받았던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채플 시간에 “호기심을 가져라”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꽂혀 학교 여러 활동에 참여했다. 그중 정규 수업이 끝난 6시에 특강을 들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난 특강을 듣기 위해 친구들이 수업을 듣고 간 후에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붕 뜨는 시간에는 헬렌관 동산에 누워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학관을 생각하면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외관과 겨울은 물론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는 봄에도 추웠던 것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학관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너무 좋았다. 나는 한 학기에 제한된 학점을 모두 신청하고 그 외에도 청강을 통해 시간표를 꽉꽉 채워 수업을 들었다. 졸업 후 찾아간 학교에서 조교 언니는 날 보고 “졸업 이수학점이 참 높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대학 시절을 후회 없이 보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한 내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학교 근처를 가게 되면 캠퍼스를 거닐고 온다. 내가 다녔을 때보다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져 운동장 등 여유 공간이 없어진 것이 아쉽지만 이 건물들이 후배들에게 필요해 지어졌음을 알기에 아쉬움은 이내 없어진다. 이 나이가 돼서도 이화는 내게 특별한 의미기에 후배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갔으면 한다.

유정희(정외·73졸) 동문

 

학관 뒷문에서 넘어진 내게 손내밀던 따뜻한 벗들

박예지(국문·19)씨
박예지(국문·19)씨

학관은 국문과 새내기로서 대부분의 학교생활을 한 곳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느꼈던 풋풋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중 교양 수업을 듣기 위해 포스코관으로 가는 뒷문에서 겪었던 일은 이화의 벗들이 지닌 따뜻한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사건이었다. 포스코 관을 바라보는 학관 뒤쪽에는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나가 몇 개의 계단만 올라가면 학관 정문으로 나가는 것보다 편하게 포관으로 갈 수 있다.

당시 새내기였던 나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흥분한 나머지 학관과 포관 사이의 벽돌 계단을 올라가다 계단 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 당시 입고 있던 스타킹이 찢기고 무릎에서 피가 흘렀음에도 부끄러워 그냥 얼른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학관에서 나오던 벗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밴드 있으세요?”, “제가 밴드 붙여드릴게요” 라며 피가 흐르는 무릎에 밴드를 붙여줬다. 그 일 이후로 학관의 작은 문을 통해 포관에 갈 때면 이 일이 계속 생각나면서 이화만의 독특한 원동력을 떠올렸다. 학관을 오고 가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이화에 몸담은 시간이 늘어날수록,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사소한 일부터 사회적인 어려움마저 자기 일처럼 돕는 벗들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화의 벗으로 살아간 지 2년이 넘어 현재 3학년 진급을 눈앞에 둔 나는, 지금도 학관 뒷문에서 나오는 길에 넘어졌을 때를 떠올린다. 따뜻한 도움을 받았던 순간을 생각하며 벗들을 용기 내어 도우려고 노력한다. 이화는 내게 넘어졌을 때 부끄러워 하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고 용기 있게 일어나는 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나 역시 이화의 벗들에게 그런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나누는 한 명의 이화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생의 동력을 얻는다.

이전 학관에서 내가 배웠듯, 리모델링한 학관 역시 벗들의 따뜻하고 용기 있는 마음이 꽃을 피우고 성숙해가는 학문의 요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박예지(국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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