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내가 되려면 종이 된 마음으로 남편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한다. 언제나 사뿐사뿐 걷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마치 으름장 놓는 듯한 이모의 말에, 베아티는 약혼자로 내정되었다는 왕자님을 만나기 전부터 뻣뻣이 몸이 굳었다. ('아기 다람쥐가 다 잘해요')

누적 조회수 1470만을 자랑하는 로맨스 판타지(로판) 웹소설 ‘아기 다람쥐가 다 잘해요’(군청주단)의 초반부다. 로판 작품을 다수 읽은 독자라면 뒷 내용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코르셋을 입고 집안을 잘 보살피길 기대받는 여주인공과 그에 보상처럼 주어지는 남자 주인공의 집착적 사랑. 이 로판의 기본적 서사 구조는 20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상과는 완전히 모순된다. 그럼에도 로판 성장의 배경에는 20대 여성들이 있다.

 

군청주단 작가가 집필한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아기 다람쥐가 다 잘해요’의 표지. 제공=에이템포미디어
군청주단 작가가 집필한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아기 다람쥐가 다 잘해요’의 표지. 제공=에이템포미디어

 

무섭도록 성장하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 애독자는 20대 여성

국내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월간 웹툰 순위에 따르면, 2월 웹툰 상위 50개 작품 중 36개는 로판 장르 작품으로 분류된다. 열람 및 구매를 포함한 사용자 반응을 기반으로 매겨진 순위다. 상위 2위부터 14위까지는 모두 로판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로판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오픈 서베이가 시행한 ‘웹툰·웹소설 트렌드 리포트 2023’에 따르면, 로판 장르 웹툰을 즐겨보는 20대 여성은 42.2%를 차지했다. 오픈 서베이는 로판 웹툰과 웹소설을 보는 여성의 비율이 전체 대비 유의미하게 높다고 발표했다. 

20대 여성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끄는 로판 장르란 무엇일까. 장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판타지 세계에 로맨스가 가미된 장르를 의미한다. 로판 작품은 현실과 구분되는 다른 판타지 차원에서 엘리트 귀족 계급 여성 주인공이 온갖 모험을 겪으며 사랑과 권력을 쟁취한다. 자세한 배경을 살펴보자. 왕의 말 한 마디에 귀족이 사형되는 시대에서 왕의 집착적 사랑을 받는 여주인공이 화려한 프릴 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쓰며 사교파티를 오간다. 중세 유럽의 강력한 절대 왕권 시대와 로코풍 드레스로 대표되는 근세 시대가 혼재된 배경이다. 

 

극대화된 차별 속에서 더욱 강조되는 로맨스 판타지 주인공의 가능성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는 20대 여성들이 로판을 즐겨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로판의 여주인공이 세계관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가부장제와 편견들을 깨부술 때 오는 전복성에 있다. 

로판 속 세계는 계급과 성차별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차별적인 세계지만 그렇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가 느끼는 미묘한 차별에 대한 분노를 증폭시킬 수 있다. 로판 등장인물이 이러한 차별을 겪고 이를 이겨낼 때 독자는 더 빨리, 그리고 더 깊게 몰입한다. 실제로 로판 웹툰과 웹소설을 주기적으로 챙겨보는 이수현(교공·24)씨는 “시대적인 배경과 대비되는 성공을 이뤄내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웹소설을 꾸준히 연구해온 안상원 교수(호크마교양대학)는 로판 장르에 대해 “굉장히 보편적 이야기”이자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경험을 집약해 놓은 형태”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독자가 일상을 살아가며 사소하게 느끼는 차별과 부당함을 세계관 자체에 투영시킨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로판의 정서적 판타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박세림 교수(웹소설창작 전공)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특징으로 “‘회빙환’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삶”을 말한다. ‘회빙환’이란 회귀,빙의,환생의 준말이다. 웹소설에서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하거나, 현실이 아닌 평소 읽던 소설 속 인물로 빙의하거나,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등의 플롯이 자주 등장하자 이를 묶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로판 속 주인공은 ‘회빙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삶을 되풀이하며 정답만을 고른다. 박 교수는 로판의 이러한 특성을 ‘정서적 판타지’라고 표현한다. 여성 독자들이 로판에서 기대하는 ‘판타지’는 시대성이나 환상성이 아닌 대리만족과 인정욕구를 기반으로 한다. 로판 속 주인공은 ‘회빙환’으로 모든 상황 속 우위를 차지할 뿐 아니라, 강한 신분제 속에서 상위 계급인 귀족 여성인 경우가 많다. 이씨는 “웹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은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라며 “화려한 옷과 배경 또한 로판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를 “현실의 엘리트주의와 능력주의가 결합된 보수적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최근 로판 장르의 '악녀'는 이전과 달리 여주인공보다 신분이 낮거나 직업적 성취가 미달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누적 조회수 7000만을 돌파한 로판 웹소설 ‘재혼 황후’에서 여주인공은 귀족 여성이며 ‘황후’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다. 반면 라이벌인 후궁 캐릭터는 평민 출신으로  궁정 업무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대조적인 구도 속에서 독자는 댓글로 주인공의 ‘귀족 혈통’을 칭찬하거나, ‘악녀’ 위치에 놓인 조연 출신을 욕하기도 한다. 로판 배경 속의 신분제와 능력주의는 현실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와 사회적 권력을 갈망하는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모든 욕망이 정당하고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여성 독자들은 로판의 잠재력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엘리트 계층의 이야기로 제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성 독자와 상호작용하며 변모하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 시장

회빙환과 악녀의 등장, 타고난 지식과 계급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과 권력의 쟁취. 다소 뻔한 서사 구조로 무장한 로판의 강한 예측성은 독자들에게 보장된 재미를 주는 동시에 반복적 이야기로 지루함을 준다. 지겨울 독자를 위해 일부 작품들은 클리셰를 보기 좋게 벗어나며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집안을 잘 경영하는 귀족 엘리트 여성에서 벗어나 직업적 다양성을 탐구한 로판 웹소설 ‘외과의사 엘리제(유인)’나 집안 바깥을 모험하는 여기사가 주인공인 로판 웹소설 ‘아도니스(혜돌이)’가 그 예시다.

이처럼 성공한 파격은 로판 장르의 시장을 개척해나간다. ‘외과의사 엘리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우는 ‘직업물’ 장르를, ‘아도니스’는 ‘여기사물’ 장르를 성장시켰다. 웹소설,웹툰스토리,시나리오 작가를 겸하고 있는 박 교수는 “이야기는 결핍에서 비롯된 인간의 욕망에서 온다”고 말했다. 로판 장르 경계가 변화하는 중심엔 여성의 욕망이 있으며 그 욕망은 실제 여성들의 숫자만큼 다양하다는 것이다.

안 교수도 로판 장르 시장의 영역 넓히기를 긍정적으로 봤다. 여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여성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끝없이 쓴다는 점이 로판의 버릴 수 없는 힘이니, 이 힘으로 이뤄지는 새로운 이야기 탐색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독자 이씨도 귀족이나 왕족이 아닌 등장인물이 자신의 사업을 경영하는 이야기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이보라)’와 ‘세레나(정이나)’와 같은 작품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군청주단 작가는 로판 웹소설은 계속해서 독자의 니즈를 수용하며 발전할 것이라 확신했다. 실제로 웹소설 시장에서는 기획 단계에서는 물론이고 연재 도중에도 변화를 주는 게 가능한 구간이라면 독자의 반응을 반영한다. 이처럼 시초부터 여성 독자를 위해 탄생한 로판은 언제나 여성 독자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기대에 부응하며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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