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번역해서 독자들이 공감할 때 가장 뿌듯하죠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있는 단어 선택의 마법사 이주혜씨 <strong>이자빈 사진기자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있는 단어 선택의 마법사 이주혜씨 이자빈 사진기자

 여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들의 이야기를 20년째 번역해오고 있는 이가 있다. 이주혜씨는 40대 중반이던 2017년부터 ▲나의 진짜 아이들▲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번역했고 ▲자두▲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등을 쓴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씨는 번역을 통해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번역’하는 방법을 배우다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 작품을 좋아했지만 처음부터 번역가의 길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영어 교사로 활동하던 시절 ‘제 5도살장’이라는 영어 원서를 접하면서 번역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씨는 “소설을 읽다가 ‘so it goes’라는 짧은 구절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 대사를 어떻게 번역하면 재밌을지 계속 고민하게 됐다”고 답했다. 20대 중반에 문학 책을 읽으며 독특한 영어 문장 해석에 매력을 느낀 이씨는 교사 퇴직 후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됐다.

주로 그림책이나 양육서를 번역한 이씨는 소설 ‘나의 진짜 아이들’을 번역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번역 업무를 시작했다. 존댓말이나 반말이 구분되지 않는 영어의 언어적 특성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씨는 “존댓말과 반말 중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대화 당사자들간의 관계, 주인공의 성격 등이 결정되기에 가장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나의 진짜 아이들’ 소설은 연인의 갑작스러운 청혼을 받은 여성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두 세계와 그녀의 운명을 그린다. 이씨는 번역을 하며 당대 여성들의 처절한 현실을 느끼기도 했다. 피임이 불법이던 시대에 영국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씨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친구의 청혼을 받고 결혼 이후에 겪어야 했던 원치 않은 성관계, 임신, 유산을 겪는 이야기가 안타까워 번역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가 맡게 된 작품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이 소설은 20대 여성 탐정이 살인 사건을 해결하면서 겪게 되는 사회적 편견을 보여준다. 이씨는 당시 작품을 번역하며 “대사에서도 여자 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요체’와 같은 여성 말투를 써야 할지, 군인같은 딱딱한 말투를 써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인물 호칭도 신경써야 했다. 이씨는 “그녀라는 단어가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성차별적 표현일 수 있고, 이름으로 적으면 인물이 많이 등장할 때 헷갈린다”며 “명칭을 정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세심하게 살핀 소설 속 단어의 의미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한 경험을 공유하는 번역가 이주혜씨 <strong>이자빈 사진기자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한 경험을 공유하는 번역가 이주혜씨 이자빈 사진기자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산문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씨를 가장 고민에 빠뜨린 지점은 단어들의 의미 해석이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불친절한 번역이 될 수 있고, 한국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번역하면 원작의 의미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이씨는 저자의 산문집을 읽으며 텍스트의 문맥을 최대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lesbian continuum’은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여성교육, 돌봄 노동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의미로까지 확장했다. 이씨는 “저자의 의도가 단순히 레즈비언이라는 용어에 갇히지 않도록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씨는 “근친상간이라는 단어도 단순히 친족 간 사랑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보니 ‘친족 간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바꿔 의미를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산문집에서 등장하는 ‘미망인’이라는 단어도 ‘(죽은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못한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어 ‘남편과 사별한 여성’으로 고쳐썼다. 

의미 있는 읽기를 위해 오늘도 한 걸음

이씨는 번역을 하며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겪는 다양한 불편함들을 보기 시작했다. 작품 속 여성과 자신이 겹쳐 보인 것이다. 청혼을 받아들인 여성들이 겪는 불편한 진실을 다룬 ‘나의 진짜 아이들’을 번역한 당시, 이씨도 번역 일과 육아를 동시에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꾸벅꾸벅 졸며 번역 일을 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커리어를 유지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번역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여성들의 다양한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많은 젊은 여성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씨는 “후배 작가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도록 더 좋은 여성 서사를 담은 책들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에게 번역은 함께 의미있는 읽기를 하는 것이다.  이씨는 “좀 더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꿔 한 명이라도 더 읽으면 행복할 것 같다”며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값진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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