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상옥’이 자신의 삶을 찾으러 호주로 떠나는 딸 ‘채영’을 끌어안는다. 상옥은 채영과 헤어지기 전 울면서 말한다.
아프지 말라는 말 듣기 싫지? 그래도…아프지 마.
섭식장애에서 벗어나고자 사투를 벌이는 채영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다.
10월2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섭식 장애를 겪는 딸 박채영씨와 엄마 박상옥씨의 이야기다. 영화는 채영씨가 섭식 장애와 싸우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과, 사랑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에 있는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모녀가 나누는 솔직한 대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애정, 미움, 욕심, 미안함 등 모녀 사이에서 느끼는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28일 아트하우스 모모 대기실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김보람 감독을 만났다.
‘섭식 장애’에서 ‘두 모녀’의 이야기까지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몸에 대한 김 감독의 관심에서 시작됐다. 김 감독은 ‘피의 연대기’(2018)를 찍으며 몸과 마음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느꼈다. 피의 연대기는 여러 시대와 문화에 걸친 월경의 역사와 생리컵, 탐폰 등 생리용품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마음이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무렵, 김 감독은 모임에서 만난 플러스사이즈 모델 김지양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10대, 20대 여성의 섭식장애 진단률이 높아지고 있어요.” 섭식장애에 관심이 생긴 김 감독은 전문가와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를 하며 부모와의 관계가 섭식 장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됐다. 김 감독은 “전문가들은 섭식 장애가 시작되는 걸 ‘미끄러진다’고 표현한다”며 “다이어트가 잘되지 않는 사람 중 섭식장애로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가족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가 많다는 가설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인터뷰했던 15~20명의 사람들 모두 섭식 장애를 겪게 된 원인으로 부모와의 관계를 꼽았다.
그러던 중 영화의 주인공 상옥씨를 만났다. 김 감독이 상옥씨가 일하는 대안학교에 ‘피의 연대기’ ◆지브이를 하러 방문한 게 계기였다.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딸 채영씨를 둔 상옥씨가 먼저 김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김 감독은 “섭식 장애가 부모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즈음 두 사람을 알게 됐다”며 “두 사람의 솔직하고 깊은 대화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 감독은 섭식장애라는 큰 주제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엄마와 딸, 우리는 평행선일까?
영화는 오랫동안 섭식장애를 겪은 채영씨의 ‘분투기’를 담았다. 영화에서 “왜 밥을 먹지 않았냐”는 상옥씨의 물음에 채영씨는 “나를 지키려고 열심히 산 거야”라고 답한다. 대안학교에서 사감으로 근무하던 엄마 상옥씨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딸 채영씨는 엄마의 사랑이 고팠다. 극중 채영씨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먹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유일했다. 김 감독은 “섭식장애는 외모, 다이어트 강박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다는 채영씨의 이야기를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섭식장애에서 시작한 얘기지만 그 끝에는 두 모녀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삽입곡 ‘양’에는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보이겠어요”라는 가사가 나온다. 김 감독이 본 두 모녀의 사랑은 ‘어리석은 사랑’이다. 보통 엄마들의 사랑은 어리석거든요. 부모로 서 해줘야 하는 건 그냥 지켜보며 지지해주는 건데, 대부분은 그러지 못하시죠.”
자신의 삶을 살아보고자 채영씨가 호주로 떠나는 날, 상옥씨는 딸 채영씨를 안고 묻는다. “아프지 말라는 말 듣기 싫지? 그래도 아프지마. 아프지만 마.” 먹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투쟁이던, 섭식 장애와 끊임없이 싸워 온 딸이 가장 듣기 싫다는 말을 떠나는 순간에 하고야 마는 엄마. 하지만 엄마로서 딸에게 해줄 말은 “아프지 말라”는 말뿐이다. 김 감독은 “아프지 말라는 말을 끝까지 참지 못한 부모의 어리석은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부모와 자녀의 사랑은 늘 쉽지 않고, 자식이 원하는 것과 부모가 원하는 것은 항상 어긋나요. 엄마 입장에서는 애가 아픈데 아프지 말라는 말밖에 사실 할 말이 없거든요. 근데 딸 입장에서 때로는 그 말이 죽기보다 싫어요. 그래서 평행선 같은 두 모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서로를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관계요.”
여성 감독이 만드는 여성 다큐멘터리
김 감독은 주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극 영화보다 소수의 사람이 만드는 다큐멘터리가 더 잘 맞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그는 “독립영화 중에서도 다큐멘터리는 비주류 장르고 여성을 다룬 건 더 비주류”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상업영화만큼 이익을 남기기도 어렵다. 그는 “2016년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 번도 영화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며 “빚을 져 영화를 찍거나, 지원금을 받아 영화를 만들어도 촬영하는 동안 저의 인건비는 나오지 않는 것이니 돈을 못 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일을 계속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게) 괴로워 드라마 쪽으로 넘어가야 하나 별생각을 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계속한다. “돈을 번다고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아요. 남들이 볼 때는 바보 같아도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일을 하며 고통을 느끼더라도 그 고통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에 신경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데는 영화계 선배 변영주 감독의 조언도 있었다. “너 영화 잘 안될 거야. 근데 그냥 좋은 관객들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개봉하면 돼.” 그는 변 감독의 말을 듣고 “잘 봤다”, “인상깊었다”는 관객들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그는 “내가 만든 영화로 위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해진 게 없는’ 감독이다. 김 감독은 “다큐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깨닫고 공부하는 것, 시작해서 마무리될 때까지의 과정에 쾌감이 있다”며 “다음에는 또 다른 새로운 형식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지브이(GV): 감독과 배우가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는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