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만 알 뿐 영어로 말하진 못합니다. 그럼에도 물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물리학자 마스카와 도시히데가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후 한 말이다. 그는 노벨상 시상식에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영어에 서툰 학자가 학계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모습은 오늘날 한국 대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스카와 같은 학자가 한국에서 탄생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 대학의 교원 평가 관행과 관련 있다. 교수들은 교원종합평가를 통해 연구 실적을 평가받는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재임용이나 정년 보장 여부를 심사한다. 연구 실적 평가는 번역이나 저술보다 논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논문의 내용보다도 개수가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해외 학술지에 게재된 영어 논문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다. 영어 논문은 연구 실적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다. 이 피라미드 속에서 영어에 서툰 학자가 높은 학문적 성취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인문학의 경우 어려움이 더 크다. 영어로는 우리말로 사유한 연구를 표현해내기 어려워서다. 언어를 중심으로 사유하는 인문·사회 과학의 경우,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사전적 의미만으로 전달되지 않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한양대 류웅재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국내의 문제를 영어로 풀어내는 과정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양적 평가 중심인 연구 실적 평가

“논문 작성 편수로만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게 옳은 걸까요?”

현재 교수 실적 평가는 논문 위주로 이뤄진다. 다른 지식 활동보다 논문, 질보다는 양을 중심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연구의 내용과 목적은 간과된다. 서울대 박찬구 명예교수(윤리교육과)는 현재의 방식이 “허울만 좋은 양적 평가”라며 “행정적으로만 편리한 방식으론 연구를 심층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신승환 교수(철학과) 또한 저서 ‘지금, 여기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이 위기를 맞은 원인 중 하나가 논문 중심으로 교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며 “논문으로만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학문의 길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칸트를 예시로 들며 현재의 정량적인 교수 평가 방식을 비판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45세에 교수가 됐지만 약 10년간 별다른 연구 업적이 없었어요. 이후 57세에 첫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완성했죠. 칸트가 재직하던 대학에서 오늘날 한국 대학의 교수 평가 방식을 적용했다면 이 명저를 발표하지도 못한 채 퇴출당했을 거예요.”

 

실적 평가의 꼭대기엔 영어논문이 있다

대부분의 국내 대학은 교원종합평가에서 학술지 논문 등급을 구분한다.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논문을 많이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외 유수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야 한다. 세계화에 따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연구 성과 창출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본교 교원종합평가에서는 인문사회계열 논문을 국제학술지 평가자료(SCIE, SSCI, A&HCI)에 등재된 학술지에 게재할 경우 150점에서 500점 사이의 점수를 받을 수있다. 그러나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에 게재할 경우 최대 100점밖에 받지 못한다. 최대 5배의 점수 차가 나는 것이다.

박 교수는 “후배 교수들이 영어 논문에 대한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신진 교수들이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우리 상황에 접목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양적 평가로 인한 시간적 압박이 있으면 그게 매우 힘들어지죠. 교수 평가를 위해 영어로 논문을 쓰고 외국 학술지에 게재하는 일은 과도한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어요.”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인문∙ 사회계열의 논문은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수 없다. 중앙대 고부응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저서 ‘대학의 기업화’에서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학문적 의의를 생각해보면 국제학술지 논문보다 국내학술지 논문을 더 가치있게 평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언어에서 시작해 언어에서 끝난다

언어가 연구의 과정과 결과 그 자체인 인문학은 이러한 평가 문화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는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은 논문이 실험 결과 위주이므로 언어 표현에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연구 주제와 이론, 방법론이 언어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적 사고가 요구되는 인문·사회과학은 다르다. 류 교수는 인문학 연구의 특성을 강조했다. “인문학 논문은 논리 간 모순이 없도록 섬세하게 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가 중요한 매개가 되는 거죠. 텍스트 분석 같은 질적 연구는 언어가 연구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합니다.”

학계에서도 이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던 것은 아니다. 류 교수는 “대학 내 구성원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어도 이것이 의미 있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만들어진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은 우리말에 기반을 둔 학문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2010년도 이후부터 관련 활동은 줄어들었다. 매년 발간했던 문집도 2011년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류 교수는 “한국 사회의 세계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이전 학자들의 논의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설득력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지금, 여기의 인문학

논문 개수와 영어 논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학계 발전의 저하로 이어진다. 인문학자 박상익은 저서 ‘번역청을 설립하라’에서 “2008년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학계에서는 한국 현실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를 국내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탄식이 나왔다”고 밝혔다. 해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 수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관행 때문이다. 그는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다”며 “미국 경제학회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 또한 “학술지는 그 나라 사람들의 현재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반영한다”며 “영미권 학술지의 경우 한국적인 문제의식이 주목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을 게재하는 것 자체도 힘들다”고 말했다.

류 교수는 우리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존해 풀어나가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현재의 글쓰기 주제와 관행은 연구자로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모국어로 통찰하는 대신 해외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적절한 설명과 대안을 제시하거나 사유의 깊이를 담보하는 양질의 연구를 생산하기 어렵게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 실적을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국대 노영희 교수(문헌정보학과)가 세계 대학평가 순위에서 상위에 오른 50개 대학을 분석한 결과, 모든 대학이 질적인 요소를 심사할 수 있는 다양한 평가 문서를 요구했다. 스탠포드대의 경우 ▲학술 활동 및 생산성, 영향성, 혁신 및 창의성 ▲동료, 직원, 학생과 효과적인 의사소통 ▲제도적 준수 및 윤리 등을 질적 평가 기준으로 제시했다.

반면 국내 대학의 교수 임용은 주로 논문에 대한 양적 평가, 학과 내 공개 강의와 질의응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박 교수는 “논문의 수나 해외 학술지 게재 여부만을 확인하는 양적 평가는 교수의 학문적 축적에 대한 심층적인 검증이 어렵다”며 “논문 내용의 우수성과 영향력을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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