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성추행, 강간 범죄, 기타 성범죄 등에 부당한 처벌을 무죄, 불기소, 집행유예로 이끕니다' 

2017년 4월, 지하철 교대역에 게시된 광고 문구다. 이 문구를 본 이후로 인터넷에 성범죄 관련 광고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모두 성폭력 가해자가 무죄나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목격한 김보화 소장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연구를 시작했다. 2021년 김 소장은 관련 내용으로 본교 박사학위 논문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 비판과 ‘성폭력 정치’의 재구성에 관한 연구’(김보화, 2021)를 저술했다. 2023년 2월에는 논문을 수정·보완해 저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출간했다.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여성학 박사·21년졸)을 만나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보화 소장이 집필한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수현 기자
김보화 소장이 집필한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수현 기자

 

성범죄 감형 패키지 팝니다 

인터넷 포털에 ‘성범죄’를 검색하면 ‘비밀보장, 검증된 실력, 성공사례 다수, 노하우 기초’와 같은 단어들이 뜬다. 성범죄 형량을 줄이고 재판을 승소로 이끌겠다는 성범죄 전문 변호사와 법무법인 광고들이다. 가해자들은 이들의 재판 ‘성공 사례’를 보고 성공률이 높은 변호사를 선택한다. 시장에서 상품들을 비교하며 쇼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김 소장은 이 현상에 주목했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이라는 제목도 여기서 비롯됐다. 핵심은 가해자들이 법 시장에서 소비자가 됐다는 점이다. 그는 “이젠 성범죄에도 경제의 논리가 적용된다”고 분석했다. 

 

한 '성범죄 전담법인'의 성공 사례. 출처=홈페이지 캡처
한 '성범죄 전담법인'의 성공 사례. 출처=홈페이지 캡처

성범죄 전담 법인들은 가해자들에게 ‘감형 전략’을 제시한다. 가해자들은 기부 영수증, 헌혈증, 반성을 증명하기 위한 정신과 치료 기록, 성폭력 예방 교육 이수증, 심지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받은 상장까지 모두 모아 제출한다. 감형을 위해 여성단체에 억지 기부를 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덕분에 여성단체는 감형 목적 후원자를 가려내기 위해 에너지를 배로 쓰게 됐다. 가해자들은 감형받기 위해 흔히 ‘스펙’이라고 칭할 수 있는 항목들을 하나하나 채워간다. 모든 과정에서 이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억울함이다.

인터넷 카페 형식으로 운영되는 가해자들만의 커뮤니티도 존재한다. 성범죄 가해자만 가입이 가능하고, 가입을 위해서는 본인의 사건 내용과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적어야 한다. 카페 활동을 성실히 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범위도 넓어진다. 김 소장은 “각종 반성문 샘플이나 서식들까지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이런 카페에서 가해자들이 많은 위로와 공감을 얻으면서 힘을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 놀라운 점은 법인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페를 관리하는 법인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한 법인이 일정 기간 수익을 내면 또 다른 법인이 들어와 카페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런 카페들은 변호사들의 중요한 시장이자 가해자들이 떳떳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됐어요."

 

산 넘어 산…정말 억울한 건 누구 

성범죄 전담법인과 가해자들의 커뮤니티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건 성범죄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는 그냥 적당히 좀 반성하는 제스처를 보이면 형량을 깎을 수 있는 종류의 범죄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는 성범죄를 사소하게 생각하는 재판부와 사회 전반에 깔린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감형 목적으로 법원에 제출하는 헌혈증, 우수상 모두 범죄나 피해자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판사에게 쓰는 반성문도 마찬가지다. 김 소장은 "피해자한테 반성문을 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이런 것들을 재판부에서 공공연하게 감형 사유로 받아주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사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피해자들이 합의해주지 않는 이유는 가해자의 감형을 원치 않기 때문인데, 현재의 사법제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연구에 참여한 한 인터뷰이는 “고소의 장으로 들어가니까 사법 체계의 온갖 남자들하고 다 싸우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소를 한다는 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만큼 가해자의 처벌을 바라기 때문인데, 허망하게 감형이 되는 걸 보면서 정작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 현장에서 배제되는 거죠.”(김 소장)

 

피해자는 여러 정체성과 경험 중 하나일 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의 시선이다. 김 소장은 “성폭력이라는 범죄를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다고 너무 끔찍한 일이어서 피해자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거로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김 소장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치유되고 회복된다.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을 겪은 이후에 어떤 사람은 여행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슬퍼하고, 다른 사람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또 다른 사람은 연인과 헤어지기도 하고…그건 알 수 없는 거예요.”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는 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 저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출간했다.   김수현 기자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 소장. 저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출간했다. 김수현 기자

반성폭력 활동가로 오랜 시간을 보낸 김 소장에게 이 연구는 삶 자체였다. 현장 기반 연구를 진행하며 많은 피해자를 만난 그는 “피해자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인터뷰이들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인터뷰를 기점으로 오히려 힘이 생겼다는 사람, 새로운 꿈을 찾은 사람, 자신만의 치유와 회복의 길을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김 소장도 힘을 얻었다. 연구는 참여자들과 김 소장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김 소장은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에서 나와 젠더폭력연구소라는 1인 연구소를 세웠다. 자유롭게 연구하고 공부하기 위해서다. 현재는 아동 청소년 성착취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는 “당분간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려고 한다"며 앞으로의 행보를 밝혔다.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는 김 소장. 활동가이자 연구자인 그의 발걸음은 계속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