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영 산부인과에서 만난 임선영 원장 출처=코오롱 (재)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위원회
임선영 산부인과에서 만난 임선영 원장 출처=코오롱 (재)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위원회

 

“아프면 누구나 다 진료받을 권리가 있어요.” 임선영(의학∙82년졸)씨는 성소수자 진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건 진료실에서는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임씨가 37년째 운영하고 있는 ‘임선영 산부인과’는 본교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everytime.ac.kr)에서 ‘퀴어 프렌들리’한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홍익대 인근에 위치한 임선영 산부인과에서 만난 임씨는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여성 노숙인, 성매매 피해 여성, 위기청소년 등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상황에 놓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의료지원을 하고 있었다.

 

진료실 속 성소수자 위해 단어 하나하나 섬세하게

사회에서 숱한 혐오와 차별을 경험하는 성소수자는 진료실에서도 위축되기 쉽다. 이로 인해 진단 과정에서 의사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지 못하거나 아예 병원을 기피하는 성소수자도 있다. 의료진 역시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의료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다. 2021년에 들어서야 국내 최초로 서울대 의과대학에 성소수자 의료 강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환경은 현저히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넘게 성소수자 환자를 진료한 산부인과 의사가 있다. 바로 임선영씨다. 성소수자 의료에 대해 배운 적은 없지만, 학부 시절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의료윤리를 배웠기에 임씨는 성소수자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성소수자분들이 병원에 방문하기 시작했어요.”

1990년대 처음 성소수자 환자를 진료한 이후 점점 더 많은 성소수자 환자들이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진료실에서 느낀 편안함 때문이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대표가 찾아 온 적도 있었다. ‘레즈비언의 이해’라는 책자 두 권을 가지고 찾아온 그는 임씨에게 차별 없는 병원을 만들게 된 계기를 물었다. “대표가 진료실에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왔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은 똑같이 진료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죠.” 진료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그의 생각이 누구에게나 안전한 진료실을 만들었다.

성소수자 환자를 진료할 때 임씨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표현이다. 남성 파트너와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는 여성의 경우, 성병 감염이나 임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의사에게 파트너의 성별을 설명하는 것이 진료에 도움이 된다. 임씨는 성소수자에게 안전한 진료실을 만들기 위해 남자친구나 남편 대신 파트너라 표현하고, “성관계하셨나요?” 대신 “임신 가능성은 있나요?”라고 묻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진료실을 방문한 성소수자 환자들은 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병원에 방문하길 꺼리는 성소수자 환자들에게 임씨는 말했다. “아프면 누구나 다 평등하게 진료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의사가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 걱정 말고 꼭 병원에 오길 바랍니다.”

 

조금 더 아픈 사람들과 함께해 온 37년

성소수자 진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임씨가 수많은 소수자와 함께 발맞춰 걸어온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홍대 근처에) 산부인과가 두 곳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성매매 쉼터, 위기청소년 센터, 근친상간 피해 소녀 보호소 같은 비영리단체에서 저희 산부인과에 환자를 데리고 왔죠.” 하나 둘 찾아오는 단체가 늘어나며 현재 임선영 산부인과는 한국 여성의집, 서울시청소년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서울다시함께상담센터 등 여러 비영리단체와 연계해 의료지원을 하고 있다.

의료지원을 하며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다. 집단폭행으로 음부에 피멍이 들고 부종이 생긴 여성, ‘나는 창녀입니다’라는 파란 문신이 몸에 새겨진 노인, 심각한 골반염을 앓으면서도 ‘다시 잘 살아 보고 싶다’고 말했던 성매매 피해 여성까지. 그 중에서도 임씨의 기억에 남는 환자는 14살 임산부였다.

“임신한 채로 찾아온 14살짜리 학생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그 임산부도 미혼부의 자녀였어요. 그런데 본인이 미혼모가 된 거죠.” 환자를 진료하며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던 임씨. “어느 날 저에게 딸 을 낳았다고 전화가 왔어요.” 버거운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향한 의지로 희망을 피워낸 사람들 뒤에는 임씨가 있다.

1983년 사회초년생이었던 임씨의 월급은 26만 원이었다.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된 직후였다. 그중 2만 원을 기부했다. 이후 그는 매년 병원 수익의 10%를 기부해 왔다. “첫해에 2만 원씩 기부하고 나중에 돈이 더 생기면서 기부를 많이 하게 됐어요. 지금은 병원 수익의 10%를 훨씬 웃도는 금액을 기부하고 있죠.”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그의 공로를 증명하듯, 진료실 뒤편에는 상패가 늘어서 있었다. 2015년 그는 꾸준한 봉사와 기부로 국무총리상과 코오롱 우정봉사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코오롱 우정봉사상 대상 상금으로 받은 3000만 원은 모두 기부 했다.

소수자와 함께 걷는 의사 임선영. 그는 한국의사수필가 협회에서 수필가로도 활동하 고 있다. 임씨가 쓴 글에는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 그녀들의 몸에 새겨진 아픔이 담겨 있다. 그는 글을 통해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전했다.

“나의 진료실에서 만난 그녀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긍정의 힘으로 남은 인생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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