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체크포인트 찰리, 학살된 유럽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
베를린의 랜드마크 대부분은 전쟁과 분단을 배경으로 갖고 있고, 이 장소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나라에는 비긴어게인3에서 태연이 ‘사계’를 부른 공원으로 알려진 Mauerpark 역시 직역하면 장벽 공원이다. 비긴어게인3 베를린편 촬영지 도장깨기를 하던 중에서야 해당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인 유산이라고 하기에는 시민들의 일상에 완벽하게 가려져있었기 때문일까.
구글 지도에 장벽 공원이라는 한국어가 함께 표시되지 않았더라면 관광객과 시민들로 북적이는 이 공간이, 장벽구역임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문화공간으로의 비중이 압도적이면 역사적 의미는 퇴색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며칠 뒤 다른 교환학생 친구들과 장벽이 너무 낮지 않았느냐, 그정도면 너도나도 넘어볼까 싶을 것같다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던 차에 이마를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조차 갈 수 없던 ‘장벽’을 내용으로 하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와 마우어 파크는 역으로 시민들과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분단을 경고하고, 자유를 축하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를린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장벽 그자체가 아니라 장벽으로 인해 ‘억압당한 자유’기 때문에 이에 맞춰 역사적인 장소를 활용했고, 덕분에 오늘의 베를리너에게 그 의미가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이렇게 ‘기억하고자 하는 것’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기념물을 세워 그 뜻이 마음에 오래 남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대문 형무소’나 베를린의 ‘학살된 유럽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처럼 눈에 띄는 역사 공간에 익숙한 나는,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나 ‘슈톨퍼슈타이네(Stolpersteine)’처럼 아예 지상에 올라와있지 않거나 크기가 아주 작은 기념물이 제 역할을 하는지 의문도 들었다. 높이나 부피로 의미를 강조하지 않고 그저 광장과 도로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베를린에 머문 5개월간 위의 두 기념물이 역으로 이 도시의 분위기를 활용해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음을 알게 됐다. ‘테크노’로도 유명한 베를린이기에 텅 빈 도서관이 주는 ‘공허함’으로써,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도시적’인 베를린이기에 길바닥 추모석이 주는 ‘일상감’으로써 전쟁의 추악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학살된 유럽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기념물도 있다. 다만 이것 역시 그 넓이만으로 의미를 전달하진 않는다. 흔히 이 추모비들이 차지하는 공간만 보고 유대인 강제수용소 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위치는 유대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 기념물은 브란덴부르크문 옆이자, 프로이센 시대부터 나치정권의 대표자 괴벨스의 집무실을 포함해 지금의 베를린 국회의사당까지 주요 관청들이 자리하는 곳에 있다.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광장, 경복궁 주변이 되는 것이다. 국가적 책임을 인정한 학살과 부실공사, 관리로 인한 붕괴참사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순 없지만 삼풍참사위령탑이 떠올랐다. 이 위령탑은 삼풍백화점이 있던 곳에서 6Km나 떨어져있다. 땅값이 문제였다. 이런 면에서 베를린 중심에 세워진 ‘학살된 유럽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는 국가적 반성과, 국민들의 책임의식을 최대한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2015년의 시리아 난민과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에 독일이 내놓은 입장은 이런 비판과 학습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한국은 아직 분단 상태이고,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는 DMZ로 격리되어있어 종전이 아닌 휴전 중임을 역으로 점점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나, 베를린은 장벽을 바로 옆에 두고 억압되어 살았던 세대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과거를 기억하는 목적이 ‘인간이 초래한 비극을 경계’하고, 또 ‘평화를 다짐’하는 것이라면 독일의 방식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문은 붉은 벽돌로 메꿔진 채 서대문 형무소 옆에 옮겨져 있는데,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