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빠가 힘든 게 싫어요. 아빠가 행복하면 좋겠어요.” 열 살배기 딸은 혼자 병원에 가고 일곱 살 먹은 아들은 지친 아빠를 위로한다. 한편 11살 ‘형아’임에도 동생을 따라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다. 아이가 화를 내도 자막은 이를 ‘투정’으로 정의 내린다.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미디어 업계에도 거세게 불고 있는 현재, 과연 ‘다양성’의 범위에 아동도 포함되고 있을까. 본지는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미디어상에서 아동이 재현되는 양상을 살펴봤다.

 

귀엽지 않은 어린이는 없다?

“친구를 멋지고 센스 있는 이미지로 그려줬으면 좋겠어요.”

박시은(12·여·경기도 수원시)씨는 최근 또래 친구가 우연한 기회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며 들뜬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친구의 멋진 등장을 기대하는 박씨의 바람과 달리 미디어에서 어린이가 ‘근사함’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논문 ‘TV 광고의 어린이·청소년 재현 문제와 대안적 사유’(한희정, 2021)에 따르면 2019년 5월부터 2020년 4월까지 약 1년간 지상파에서 방영된 어린이 등장 방송광고 299개 중 반수가 넘는 61.9%가 어린이를 재현할 때 귀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반면 어린이가 능력 있는 이미지로 재현된 사례는 10.7%에 불과했다. 개개인의 능력과 특성은 무시하고 어린이를 귀여움의 대상으로만 객체화하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 내 아동의 출연은 해당 문제를 더욱 심화했다. 예능 출연 아동 대부분이 보호자에 의해 양육되는 일명 ‘육아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등장했기 때문이다. 돌봄과 키움의 대상이 된 아동의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는 이들의 미숙함과 이에 따른 귀여움의 발굴이 주가 됐다.

논문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나타난 아동 권리 침해’(김동윤, 2015)는 MBC ‘아빠! 어디가?’(2013)를 비롯한 4개의 아동 관련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동에 대한 외모 편견 조장, 의견 무시, 사생활 침해 등의 아동 권리 침해 사례가 총 236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오락 프로그램 속 아동은 오락의 객체 혹은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저자는 어린이의 귀엽고 미숙한 모습만을 연출해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인격과 권리는 중요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아동의 행동을 카메라로 낱낱이 묘사하며 방송가는 그들의 당연한 일상에서도 귀여움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거듭 중이다.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눈물 표시와 함께 어리숙하게 편집하거나 아이들의 정당한 항의를 투정 취급하는 화면 모두 아동의 감정이 아닌 아동을 바라보는 어른의 감정으로 구성된 장면들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채희옥 팀장은 “아동이 놀라거나 당황해서 우는 모습을 유도하고, 이에 대해 ‘귀엽다’는 자막을 넣거나 출연자들이 이를 보고 웃는 모습이 이어지는 프로그램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며 “아동을 귀엽게만 바라보고, 울거나 웃거나 화를 내는 등의 모든 반응을 귀여움의 요소로만 보고 있지 않은지 성인들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어른이 원하는 건 ‘어른스러운’ 아이

혼자서는 언제나 미숙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아동의 이미지 반대편에는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아동의 이미지가 있다. 단, 아이가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2021년 방영된 JTBC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2’(2021)에서 주인공 이익준의 아들 이우주는 7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숙함을 가진다. 함께 캠핑을 하자는 얘기를 나누던 중 익준이 병원의 급한 호출을 받자 “다녀오세요.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라며 의젓하게 대꾸할 정도다. 아빠보다 가사도우미와 지내는 시간이 길어도 투정 부리지 않는 착한 아들 우주. 이러한 모습은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아동의 이미지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MBC 드라마 ‘비밀의 집’(2022)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속 9살인 우솔은 투정 하나 없이 줄곧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열에 시달리다 병원에 가도 우솔은 “나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잖아요, 내년이면 열 살 되고”라며 자신을 걱정하는 어른을 되레 타이르는 침착함을 보인다. 논문 ‘2000년대 한국 아동 영화에 나타난 아동상’(구수연, 나성식, 2011)에서 “(미디어가) 아동기의 특징인 ‘성장’의 시간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짚어내듯, 미디어 속 아동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이미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관행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어른의 잘못된 인식, 아동 자아정체성 형성에 악영향 끼쳐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아동의 양면성은 아동을 향한 성인들의 모순된 요구를 반영한다. 귀엽지만 거슬리지 않도록, 귀찮지 않은 선에서만 미성숙함을 허락받은 아동은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만을 파편화해 재조립한 결과다. 채 팀장은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하고 소비하는 주체가 모두 성인이기에 미디어에서의 아동은 성인들의 시선에 갇혀 특정 이미지로만 구현되곤 한다”며 “아동은 획일적으로 그려질 수 없는, 개별적 특수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정익중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미디어의 왜곡된 아동 재현이 결국 아동을 향한 편협한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아동은 성숙의 과정에 있고, 소유물이 아니라 분리된 존재”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운경 교수(아동학과) 또한 미디어 속 재현된 아동의 모습과 현실의 아동이 받는 처우를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설명했다. 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부모가 아동의 신체적, 인지적, 사회 정서적 발달 단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아동에게 지나치게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거나 아동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종종 있다”며 이러한 모습이 미디어에서도 관찰됨을 분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동을 향한 모순된 재현은 아동이 미디어에서 재구성한 현실을 성인보다 쉽게 수용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갖는다. 아동은 접근성이 좋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이다. 논문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나타난 아동권리 침해’(김동윤, 2015)에서 밝히듯 미디어를 통해 재현 당한 아동의 이미지는 아동 스스로에게도 거울처럼 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아동은 무의식중에 미디어상에서 재현되는 또래의 모습을 흡수하고 모방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늘어난 아동의 미디어 소비량도 미디어 속 아동의 재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진행한 ‘2020 어린이 미디어 이용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만 3세~9세 어린이의 하루 평균 미디어 시청 시간은 약 4시간 45분으로 WHO 권고 기준인 하루 1시간의 4배 이상에 달한다. 어린이의 약 60%는 만 2세 미만에 텔레비전을 처음 접하며 약 30%는 만 2세 미만에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다. 어린 나이부터 미디어로 세상을 배우는 그들에게는 더 나은 거울이 필요하다.

 

미성숙이 아닌 성장의 과정일 뿐, 실효성 있는 규제 필요해

친구를 만나는 것, 집 밖을 나서는 것,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것까지. 일상적인 상황의 나열처럼 보여도 아이들에게는 매 순간이 성장과 도전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아이들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정 교수는 “아이들 문제의 최고 전문가는 아이들 자신” 이라며 “미성숙하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고 생산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사자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미디어 생산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권리를 누리게 하는 국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채 팀장은 “아동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인들의 인식이 개선돼야 하며, 아동에 대한 편견 및 선입견을 고착화하는 콘텐츠가 제작되거나 확산되지 않도록 미디어 제작 전반을 아우르는 실효성 있는 정책 및 가이드라인이 마련되고 실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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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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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2016~)

평화롭던 작은 마을 호킨스, 동네의 4총사-마이크, 윌, 루카스, 더스틴-은 지하실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비가 지독하게 내리던 그날 밤, 윌은 귀가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납치되고 그 순간 수상한 민머리의 여자아이, 엘이 등장한다. 친구의 실종과 새로운 인물의 등장,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갈등과 아이들의 고군분투를 그려낸 ‘기묘한 이야기’ 는 아이들의 생활반경에서 이뤄질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다뤄 주목받았다.

 

◆명징하다: 깨끗하고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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