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대학보입니다.

고된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어느새 이번 학기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네요. 이대학보도 중간고사 대비를 위한 3주간의 휴간을 마치고 발행을 재개했습니다. 오랜만에 독자 여러분들을 다시 뵙는다고 생각하니, 벌써 이번 학기의 7번째 신문을 제작하고 있음에도 새삼스러운 설렘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맘때쯤이면 모두가 기다리는 날이 있지요. 공휴일이 없는 4월을 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맞는 ‘빨간 날’,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하지만 이번 학보는 어린이날을 앞두고, 기쁘기보단 조금은 어두운 현실을 담은 아동 관련 기사를 실었습니다. 지난 발행호인 1637호에서 장애인이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다룬 기사를 실은 데 이어, 이번 호엔 아동이 미디어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비판적으로 다룬 기사를 기획했는데요. 미디어에서 아동을 단순히 귀여움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것과 지나치리만큼 어른스러운 캐릭터로 다루는 것, 두 가지 재현 양상이 모순적으로 드러남을 짚는 기사입니다.

사실 편집 과정에서 이 기사를 처음 읽을 땐, ‘그래도 어린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인 건 맞지, 그렇지만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겠다’ 정도의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근히 읽다 보니 논점은 ‘보호’가 아니라 ‘이해’임을 알게 됐고, 마음 한 켠이 불편해져서 다시 처음부터 기사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함의 근원은 제 기억들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에요. 평소 아동이 주가 되는 방송을 잘 시청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런 기억과 관련이 깊습니다. 아동을 다루는 방송을 보다 보면 어른들이 아이를 놀린다는 느낌이 자주 들곤 해요. 아이가 화가 나도, 삐쳐도, 서럽게 울어도 귀엽다며 웃는 어른들을 보면 비슷한 상황에서 여러 감정을 느꼈던 제 예전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렸지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며 말과 행동을 했는데, 어른들은 이걸 가벼이 여기고 ‘귀여운’ 존재라고만 보는 게 불쾌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아이들도 다 각자의 내면 세계가 있고, 어른들끼리의 모든 소통을 이해하진 못해도 그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자신을 대하는 반응을 보며 꽤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인식이 뇌리에 깊게 박히기도 하지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아이 캐릭터가 나오는 드라마도 마찬가지로 잘 안 보게 됩니다. 어른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말하는 아이,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대견해하고 기뻐하는 어른들. 현실에는 존재할 수도 없음에도 왠지 그런 모습을 따라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하지요.

사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고, 모두들 어릴 때 자신이 그저 귀엽고 단순한 존재 혹은 어른의 입맛을 완벽히 맞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듯 엉뚱한 아동상을 만들어 끊임없이 재현하는 모양새가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습니다.

이번 기사가 어릴 때의 여러분 모습을 떠올려보시고, 주변을 돌아보실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어린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나다 보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 왔던 미디어 속 아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어른 중심적’인지 새삼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호에서 다룬 건 미디어 속 아동 ‘재현’이지만, 미디어가 발달된 지금의 환경에서 이 재현 문제 말고도 아동 관련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3월 28일에 발행된 1636호에는 유튜브 속 아동의 놀이권 보장 현황을 연구한 사회복지학과 정익중 교수 연구팀을 다룬 기사가 있으니, 함께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움과 익숙함을 그저 따라가지 않고, 이따금 한 번씩 의심해보는 것이 중요하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자세는 이대학보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지요. 앞으로 다른 기사들을 통해서도 ‘의심’과 ‘되짚어보기’의 자세를 놓지 않고자 하니, 독자 여러분께서 꾸준히 지켜봐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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