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작가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작가

 

국어국문학과 2012년 졸업. 독립출판물 <계간홀로>와 팟캐스트 <밀림의 왕>을 만든다. 경향신문에 미디어 비평 칼럼 <이진송의 아니근데>를 연재 중이며 저서 『연애하지 않을 자유』, 『차녀힙합』, 『아니 근데, 그게 맞아?』 등을 썼다. 현대소설 연구자가 되기 위해 폭포 밑에서 수행 중.

 

책을 사들이기만 하고 읽지는 않는 사람을 일컫는 별명을 정하는 놀이가 SNS에서 흥했다. ‘활자격리소’, ‘출판계의 빛과 소금’, ‘소장학파’, ‘아가리 독서러’, ‘독서댐’…주옥같은 아이디어 속에서 단연 화제가 된 것은 ‘집책광공’이었다. ‘광공’은 서브컬쳐 장르에서 특정 대상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인데, 책에다 갖다 붙이니 제법 그럴싸했다. 동시에 찌르르, 양심이 있을 법한 갈비뼈 언저리가 아팠다. 사실 자기소개니까. 독서왕 출신 어린이는 자라서, 책을 사기만 하고 쌓아두는 집책광공이 되었다. 인스타 릴스와 유튜브에 빠져 하루를 허비하는 동안 토끼 같은 책과 여우 같은 이북 리더기에는 자랑처럼 먼지가 수북할 거외다. 이러면 안 돼! 정신을 차리고 책장 정리를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책장의 생태계가 보였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 오래전에 읽었고 지금도 사랑하는 책, 지극히 매혹되었으나 더는 나에게 유효하지 않은 책,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 연구와 공부에 필요한 책, OO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 도대체 나한테 왜 있는지 모르는 책….

버릴 것, 남길 것, 누군가에게 보낼 것을 추리며 과거의 나와 만난다.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계와 범위가 명확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니체는 인간이 유리잔에 빠진 파리와 같다고 했는데 이걸 우리 속담 식으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다. 독서는 그런 인간에게 무수한 시야와 관점을 열어준다. 동시에 책 속의 세계는 ‘지금의 나’와 가장 열렬하게 연결된다. 독서는 책이 나를 침범하는 동시에 내가 책을 나만의 방식으로 먹어 치우고 소화하는 사건이다. 저자의 목소리, 책 속의 인물과 그의 욕망, 정보, 세계관과 가치관, 메시지는 누가 그리고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같은 책인데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예를 들어, 십수 년째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열세 살 무렵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을 때는 ‘되바라졌다’라며 어른들에게 구박받는 제인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 제인이 붉은 방에 갇혀서 체벌 받을 때 느꼈던 고독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내 것처럼 생생하다. 스무 살이 갓 넘어서 다시 ‘제인 에어’를 읽을 때는, 로체스터와 제인의 ‘썸’에 몰입해서 익룡처럼 소리 지르며 읽었다. <환승 연애>도 <나는 솔로>도 없던 시절, 여러 금기와 장애물에 가로막힌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이 얼마나 가슴 뛰던지!

스무 살 중반, 페미니즘 비평을 배우며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나는 더는 로체스터에게 설렐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조연으로만 인식했던 로체스터의 전 부인 ‘버사 메이슨’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인 에어’에 영감을 받아 도미니카 태생의 여성 작가 진 리스가 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크리올계 상속인 여성인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가부장제와 식민주의의 합작으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어가는지 탐구한다. 로체스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자 로체스터에게 돌아가는 제인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은 ‘사랑’을 선택하는 결말이 ‘여성 인물’의 한계라며 파르르 떨었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는, 이 감상이 다시 바뀐다. 온몸으로 삶의 고통과 맞서고, 두려움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때로는 사랑을 과감히 등지지만, 더 이상 누구의 눈에도 빛나지 않는 몰락한 사랑을 기꺼이 선택하는 제인의 용기가 보였다.

해석과 감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다. 독서의 재미와 묘미가 바로 여기 있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하지만 지금의 ‘나’ 역시 미래의 ‘나’에게 이의제기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며, 개인의 세계와 감정과 경험은 역동한다. 이 변화는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스럽다. ‘나’는 다채롭고 풍성한 가능성의 총합이며, 독서는 어떤 시절의 내가 삶에 남긴 고유한 지문이다. 제철 과일처럼 그때여야 가능한 느낌과 감상, 그리고 ‘맛’이 있다. ‘제인 에어’를 어린 시절에 읽었기에 유년 시절의 고독에 뜨겁게 응답하고, 연애에 대한 풋풋한 환상과 설렘을 간직한 채 읽었기에 제인과 로체스터의 간질간질한 티키타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듯이.

아끼며 모았던 책을 과감하게 버릴 때는 생각한다. 이런 걸 좋아했단 말이야? 흑역사라고 생각하는 취향조차도 무의미하지 않다. 심지어 사기만 하고 안 읽은 책도 그때의 내 욕망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여전히 반짝이는 책을 보면 한없이 반갑다. 오래된 것을 선뜻 끌어안을 수 있는 경험은 너무나 귀하다. 책의 앞장을 들춰보다가, 더는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의 글씨를 발견할 때도 있다. 한때는 그 사실이 몹시 괴로웠다. 사람도 책처럼 절절하게 매료되는 시기가 있을 뿐이었다.

책장 정리를 끝내고 나니 빈자리가 제법 나왔다. 그만큼 끌리는 책을 골라 다시 채워놓을 시간이다. 아니, 사두기만 했던 책을 펼쳐 낯선 세계로 숨 참고 낙하하는 것도 좋다. 현재의 독서는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뒤흔드는 동시에 과거의 나를 불러내고, 미래의 나로 건너가게 한다. 읽고 또 거듭 읽으며, 평범한 일상 곳곳에 나만의 타임캡슐을 숨겨보는 건 어떨까.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작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