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선물을 올리는 마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한 딸이 있다. 바로 이상미(섬유예술·88년졸) 작가다. 이 작가는 2021년 어머니를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떠나보낸 후 삶의 유한성에 대해 깨닫게 됐다. 그는 어머니 민자를 보낸 후 30년간 깊이 몰입하지 못했던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됐고, 마침내 8일~14일 개인전 ‘민자, Voilà!’를 열었다. Voilà는 불어로 ‘짜잔, 여기 봐’라는 뜻이다. 민자를 애도하는 마음보다는 ‘민자가 살면서 누리지 못했던 신나는 삶을 내가 대신 살아가겠다’는 포부가 담겼다. 다채로운 화랑이 가득한 인사동 돌길을 걷다 보면, 새까만 외벽이 매력적인 갤러리가 보인다. 그곳에서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는 이 작가를 만났다.

이상미 작가는 ‘민자, Voilà!’에 선보이는 작품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에덴의 저편'을 꼽았다. 작품 앞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상미 작가. <strong>김수미 기자
이상미 작가는 ‘민자, Voilà!’에 선보이는 작품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에덴의 저편'을 꼽았다. 작품 앞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상미 작가. 김수미 기자

 

섬유로 공간을 수놓다

갤러리 문이 열리자마자 전선과 코일의 꼬임으로 장식된 작품 두 개 ‘그곳, 원초적 자리Ⅰ, Ⅱ’가 보였다. 본래 이 작가는 절벽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곳, 원초적 자리Ⅰ, Ⅱ’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만들다 보니 절벽이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밤에 이 작품을 작업하면서 오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음부처럼 보였어요.” 그는 그때부터 “생명을 품고 태어나게 만드는 에너지를 지닌 것은 여성의 음부”라는 생각을 하고 작품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여성의 음부는 생명을 잉태하는 원초적 부위인데, 그걸 창피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회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갤러리 입구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벽면에는 초록빛 숲이 표현된 작품 3개가 걸려 있었다. 작품명은 ‘에덴의 저편’. 3개 작품 각각 ‘바람’, ‘시작’,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가가 직접 거즈를 하나하나 붙여 완성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는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 통틀어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에덴의 저편을 꼽았다. 에덴의 저편은 그에게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였기 때문이다. “매일 시간 나는 대로 거즈를 붙이며 그날의 거짓말, 슬픔, 분노를 위로하는 마음을 가졌어요.” 그가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찾는 색은 초록이다. 푸른 숲이 연상되는 에덴의 저편을 만들며 이 작가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철사, 코일, 거즈, 실, 양모 등 다양한 섬유로 표현된 게 특징이다. 이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추구하는 것 외에도 자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수를 통해 조형 예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은 이화여대뿐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가는 “국내 최초로 자수과가 도입된 이화에서 자수를 배우는 것에 대한 시너지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북한인권 오페라 '윤동주와 시간거미줄, 북한인권을 노래하다'(2023) 공연장 입구에 전시됐던 이상미 작가의 '겨울나기_날개'. 그는 이 작품에 얼어붙은 북녘에서 들려오는 우리 동포의 통곡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았다. <strong>김수미 기자
북한인권 오페라 '윤동주와 시간거미줄, 북한인권을 노래하다'(2023) 공연장 입구에 전시됐던 이상미 작가의 '겨울나기_날개'. 그는 이 작품에 얼어붙은 북녘에서 들려오는 우리 동포의 통곡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았다. 김수미 기자

 

민자, 여기 봐!

“엄마가 딸에게 먹이려고 준비한 고기가 우리 집 식탁에 있었을 때, 엄마 영정 사진은 장례식장에 걸려 있었죠.”

토요일, 이 작가는 어머니와 시장에 가서 함께 장을 봤다. 일요일엔 어머니와 문자를 나누며 다정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다음 날, 가슴이 답답해 응급실을 찾은 어머니를 만나러 그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지만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상태였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보며 그는 “인생은 한 번뿐이고 사람은 죽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작가는 어머니의 유언에도 의문을 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병실에 보호자 한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던 당시,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보호자로 들어갔다. 이 작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이필영, 사랑해”를 외치고 돌아가셨다. 남편을 향한 사랑 고백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사랑한 건 맞지만, 평생 남편에게 양보하며 살아서 착각한 사랑은 아니었을지 의문이 들었어요.” 어머니 유언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것들이 과연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이 작가 삶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그가 굳게 믿어온 삶을 뒤집는 의문은 ‘민자, Voilà!’에서 선보이는 작품들 속 ‘발상의 전환’ 형태로 담겼다. 절벽이라고만 생각했던 작품을 180도 뒤집어 바닥처럼 보이게 하는 것과 암석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을 음부로 표현한 것이 그 사례다.

이 작가의 발상의 전환이 담긴 ‘그곳, 원초적 자리Ⅰ, Ⅱ’. 그는 본래 암석의 에너지가 담긴 작품을 만들려 했지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성의 음부를 표현한 작품을 만들었다. <strong>김수미 기자
이 작가의 발상의 전환이 담긴 ‘그곳, 원초적 자리Ⅰ, Ⅱ’. 그는 본래 암석의 에너지가 담긴 작품을 만들려 했지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성의 음부를 표현한 작품을 만들었다. 김수미 기자

 

미술로 사랑을 실천하며

그가 지금까지 작가로서 작품 활동만을 이어온 건 아니다. 이 작가는 학부생 시절부터 예순을 앞둔 지금까지 약 40년간 장애인들에게 미술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본교에 재학하며 장애인 시설로 다녔던 봉사에서 미술을 가르쳐주고 그들과 소통하는 걸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작가는 장애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지내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이 작가는 장애인들이 도심 밖 시설에 모여 지내는 것에 속상함을 표하기도 했다. “어릴 적만 해도 동네를 오가며 장애인 분들을 많이 뵀는데 요새는 도심 밖 시설에서만 지내고 계시죠.” 2주에 한 번씩 80km 떨어진 중증장애인 시설 ‘가평꽃동네 희망의 집’까지 13년째 오가는 것은 봉사가 아닌 당연한 일이라는 그의 생각이 담긴 말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미술로 사랑을 나눠온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학부생 시절부터 지녀오던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 작가는 84학번으로 입학할 당시 민주항쟁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데모하는 학생들이 이화교를 넘어 도망치면, 전경들이 학생들을 잡아서 끌고 가던 때다. 당시 전경들을 피해 도망치던 학생들은 계단이 많은 대강당쪽으로 갈 수 없어서 평지인 조형예술대학 건물쪽으로 달렸다. 청 미니스커트에 빨간 구두가 유행하던 80년대, 당시 학생들은 도망치는 동기들을 구해주기 위해 그들 위로 엎어졌다. 전경들이 짧은 치마를 입은 학생들의 몸을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들은 몸으로 막아가며 민주항쟁을 도왔는데, 나는 편안하게 그림 그리는 학생으로 지낸 게 오래도록 미안했어요.”

사회가 변화할 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게 오랜 후회로 남은 이 작가는 자신이 가진 미술이라는 재능으로 사회에 작은 보탬을 만들고자 살아왔다. 장애인들과 함께 미술로 소통하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고뇌해 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떠난 이 작가의 작품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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