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이한서(국문‧23)

출처=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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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십 초

십, 구, 팔, 칠, 육, 오… 이제 진짜 울린다.

지금

 

아 아니다, 앞으로 십 초 더 남은 것 같다.

십, 구, 팔. 마저 숫자를 세기도 전에 알람 소리가 따갑게 귀를 파고들었다. 오늘도 틀렸다. 허겁지겁 눈을 번쩍 뜨고 소리가 두 번 울리기 전에 빠르게 알람을 껐다. 하지만 이미 짧게 울렸다 사라진 소리는 귓가를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짜증스럽게 눈을 찌푸리고 누운 자세 그대로 귀를 막았다. 적중에 실패한 날은 이렇다. 귀를 막아도 소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손바닥 틈을 타고 들어와 귓구멍 속으로 침투해 고막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소리가 희미해지고 나서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무의식 속에서 알람이 울리는 시간을 맞추기 시작한 지 1314일째.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 것인데 나에게는 알람 시간을 맞추는 재능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혐오스러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잔뜩 닭살이 돋아 있는 귀를 벅벅 문지르고 목이 늘어난 흰 티 대신 구겨진 셔츠에 두 팔을 끼워 넣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놓여있는 바지에도 다리를 집어넣으면서 화면이 까맣게 물든 노트북과 서류들이 널브러진 침대를 쓱 둘러보았다. 대충 그 가운데 필요한 것들만 집어서 가방에 밀어 넣었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방바닥은 여느 때처럼 쓰레기가 바닥 타일 존재의 유무마저 지워버리고 있었지만, 눈을 감는 것으로 무시하고 방문을 닫았다. 현관 거울에 비치는 제멋대로 비죽거리는 기름진 머리와 눈 밑에 검게 피어난 다크서클 역시 무시했다. 샤워 대신 아침잠을 택한 지 역시 1314일째. 오늘은 알람 시간을 맞추지 못해 누워있는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뛰어야 한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가을바람이 얼굴에 훅 다가왔다. 건조한 피부가 따가웠지만 바람으로 세수한 기분이 들었기에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얼굴에 하얗게 쌓여 있었던 각질이 그 바람에 전부 날아갈 것 같았다. 짓눌린 신발의 뒤꿈치를 고쳐 신으며 구름 한 점 없이 흰 도화지에 틈도 보이지 않게 새파란 물감을 들이부은 것 같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신이시여, 오늘도 당신을 저주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관망하는 당신이 고작 나라는 인간의 소원 하나 이루어주지 못한다니. 얼마나 모순적인지. 다른 것도 아니고 일부러 가장 쉬운 것으로 빌었는데. 로또 당첨도, 사내 실적 1등 사원도, 승진도, 보너스도 아니고 그냥. 그냥 눈을 감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게. 제발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쉬운 소원을 빌었는데. 그것 하나 해주지 못해 그놈의 알람 소리를 또 듣게 하다니. 이처럼 무능한 신이 또 어디 있을까.

입에서 되는대로 돌아오는 답이 없는 유일한 대상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아,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이런 좋은 날에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걸어가는 한걸음에 나에게 또 하루를 쥐여준 신을 원망했고, 두 걸음에 또다시 눈을 뜨고 걸음을 내딛는 나를 원망했고, 세 걸음에 얄팍한 의지를, 네 걸음에 부족한 재능을, 다섯 걸음에 선천적인 성격을 원망했다. 그리고 여섯 걸음.

“안녕”

익숙한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지하철역까지 가기 위한 길에 놓여있는 횡단보도. 정확히는 그 횡단보도 옆에 서 있는 어느 가로수 앞이었다. 익숙한 그 자리에서 익숙한 인사말을 건넸다. 줄 맞추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나무 중 가장 끝도 아니고 가장 크지도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이 평범한 두 번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밑동을 잘라, 줄줄이 늘어놓으면 어떤 나무인지도 구별하지 못할 것 같은 그 녀석은 익숙하게 나의 인사를 무시했다. 옆에서 등교하기 위해 함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고등학생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귀에 이어폰을 꽂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도 참 부럽다. 정해진 그 자리에서 똑같은 자세로 우뚝 서 있는 자태. 언제 떨어져 나간 건지 색이 바랬던 잎들마저 다 떨어져 나가 바닥을 나뒹굴고 나무는 헐벗은 모습이었다. 가지치기를 했는지 몇 없는 앙상한 가지에는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만이 위태롭게 달려있었다. 그마저도 바람에 휘날려 하나둘 날아갔다.

“너는 오늘도 하고 싶은 일이 없겠지? 하는 일도 없지? 참 부럽다. -비아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한 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나는 네가 참 부러워. 하고 싶은 일도 하는 일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삶은 어떤 거야? 그건 그냥 의식이 없는 삶인 건가. 하지만 너는 살아있잖아. 살아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지. 네 잎은 햇볕을 받아 자연스럽게 자라고 뿌리는 땅의 양분을 빌어먹고 비를 머금으면서 자연스럽게 목을 축이고 바람이 색이 변한 나뭇잎들을 떨어뜨려 주고. 그 흔한 열매조차 스스로 맺지 않는데. 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구나? 부럽다. 정말 부럽다. 혹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유모차를 끌고 오던 아주머니가 나무에 대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황급히 길을 틀었다. 나는 여전히 빨간불인 신호등을 잠시 쳐다보고 다시 나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서 가져가 줘.” 그리고 나 대신 거리를 활보해줘. 길고 어지러운 뿌리들을 꿈틀거리며 길가를 걷고 나뭇잎이 날리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낭만적인 효과를 직접 머리를 흔들어가며 보여줘. 닿지도 않을 애원을 하는 사이에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평생 가보지 못한, 평생 가볼 수 없는 저 건너편으로 가보고 싶지 않니?

나무는 늘 그렇듯 답이 없었다. 하긴, 네가 그런 의지가 있었더라면 이곳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 않았겠지. 하다못해 태풍에 몸을 날려 옆 동네의 풍경이라도 보고 왔을 것이다. 나 역시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톱을 꺼내 저 녀석의 몸통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앉아 평생을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흉내 내며 눈을 감고 싶다. 그런 안락한 삶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내 안에는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의지라는 이름의 벌레이다. 벌레는 쉬지 않고 온몸을 기어다닌다.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나는 벌레의 발자국이 남기는 가려움에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벌레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사라지지도 않는다. 대가리를 터뜨려 죽여도 그 흔적에서 알을 까고 나와 다시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내가 다시 눈을 감지 못한 것도, 지금 저 나무 대신 그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도 전부 그 벌레가 아직 내 몸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넜다. 녹색 불은 어느새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었다. 뒤돌아 작별 인사를 건넬 시간은 없었다. 지하철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마음속으로 작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볼 때는 너 대신 그곳에 설 수 있었으면.

/

“저는 벌레가 싫어요.”

나의 말에 유대리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살짝 틀고 대답했다. “저도요. 요즘 날씨가 꽤 추워졌는데도 모기가 참 많더라고요.” 나는 유대리 쪽을 쳐다보는 대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숨을 내쉬자 차가운 공기와 섞인 불투명한 연기가 멀리 나가지 못하고 입가를 맴돌았다. “말고요.” 숨을 내쉬는 동시에 그 숨과 함께 내뱉은 나의 말에 유대리가 고개를 완전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 벌레 말고 있어요. 제 안에 있는 거.” 유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꾹꾹 밟으면서 물었다. “뭐 회충 같은 건가요?” 그는 이미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 역시 충동적으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더는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유대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말과 함께 뒤돌아 걸어갔다. 나는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구대리님!” 뒤에서 유대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가 걸어가던 애매한 자세 그대로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집에 구충제 있는데 가져다드릴까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멍해졌던 것 같다. 큭큭큭. 정적을 깨고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유대리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가 웃긴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혼자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구충제로 해결될 게 아니라서요.” 아. 유대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지만 나지막이 감탄사를 뱉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웃었나.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 지극히 간단하고 일차원적인 해결 방안에 나도 모르게 나를 지독하게 붙잡고 있던 문제가 아주 작아 보여 웃음이 났다. 정말 이것이 벌레라면 구충제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유대리의 말을 잠깐 곱씹어보았다. 회충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실질적인 형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나에게 해롭다는 건 똑같다. 의지라는 벌레. 아주 성가시고 온몸을 끝도 없이 좀먹는 그러한 벌레였다. 심지어 아무리 없애려고 노력해보아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난다. 나의 정신은 그 끈질긴 생명력에 지쳤고 몸은 이미 그것에 뜯겨 갉아 먹힌 흔적만이 가득했다. 더는 내어줄 것조차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쉬지 않고 꿈틀거린다. 꿈틀꿈틀. 큭큭. 구충제 이야기를 꺼내는 유대리와 그것이 꿈틀대는 모양새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멀어지던 담배 연기가 다시 입안으로 빨아들여지면서 목에 걸려 기침이 났다. 기침과 함께 목에 가득하던 이물감을 뱉어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물 밑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자만 가만히 서 있는 나무도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면서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릴 때까지 가만히 담배를 피웠다. 알림은 과장님으로부터의 업무 지시였다. 알림을 확인하고도 나는 쉽사리 걸음을 떼지 않았다. 아, 이대로. 눈을 살포시 감았다. 꿈틀. 눈을 감자마자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작업이 머릿속을 스쳤다. 팀 실적 일등, 그리고 승진과 성공. 새로운 도전. 꿈틀. 힘겹게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정말이지 나는 평생 이 끝도 없는 괴롭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

몇 시인 거지.

낯선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항상 무의식 속에서 알람 시간을 맞추는 감각이 오늘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늦게까지 보다 잠든 노트북이 머리맡에서 뒹굴고 있었다. 서류들은 다행히도 정리해둔 그대로 노트북 사이에 정갈하게 끼워져 있었다. 침대 옆 창문으로 보이는 밖은 다른 때보다 조금 어두운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어 빠르게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 삼십 분. 다섯 시면 원래 기상까지 한 시간이 남은 시간이다. 잠든 지는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원래 잠들면 잘 깨지 않는데 왜 이 시간에 잠에서 깬 거지. 다른 때는 꿈조차 꾸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잠들어 항상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쯤부터 알람이 울릴 것 같은 느낌이 잠들어 있는 나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루의 일과 같은 알람 시간 맞추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그 시간이 계속되고 대부분은 맞추지 못하고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눈을 뜬다. 입사하고부터는 거의 항상 그래왔는데 그 루틴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깨져버렸다. 오늘은 분명 알람이 울릴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잠에서 깬 걸까? 분명 발이 간지러웠던 것 같,

어?

어어?

음성이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내 입에서 나온 소리이지만 낯설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심코 발을 바라본 순간, 나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발이 없다.

분명 어제까지 멀쩡하게 존재하던 뭉툭한 발가락과 굳은살이 단단하게 생긴 발뒤꿈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발이 있던 자리에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단단하고 거친 표면을 가지고 있었고 허벅지 밑으로 두 다리가 있던 곳에 굵게 자라나 땅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래, 마치

“나무…”

나무처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멍하니 다리가 있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그 괴상한 존재를 더듬었다. 차갑고 딱딱하다. 울퉁불퉁하게 거친 표면이 내 손길이 지나가는 대로 조금씩 부스러진다. 꼭 나무껍질이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가루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 거지? 112? 119? 아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한다면 대충 과학 기관의 연구원을 소개해 주지 않을까?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게 맞나?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덮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어지러운 생각들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물어 어려운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 왜 나에게, 라는 질문에까지 도달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쩌면 어제 먹은 음식 중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체 모를 외계의 생명체가 가지고 온 음식을 내가 우연히 먹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원한을 가지고 벌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제의 나에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일어나서 평범하게 출근하고 평범하게 밥을 먹고 평범하게 퇴근했고 평범하게 일을,

아,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황급하게 침대의 머리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흰색 약통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구충제. 난 어젯밤 구충제를 먹고 잠들었다. 일을 마친 늦은 새벽, 문득 유대리가 이야기한 구충제가 생각났고 밑져야 본전이지 구충제를 먹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급상자를 뒤져 찾은 구충제를 한 알 먹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제의 일과에서 변화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약통으로 손을 뻗었다. 바닥에 붙어 있는 하반신이 거슬렸다. 겨우 약통을 집고 겉면에 붙어 있는 글씨들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먹은 약은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구충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다 뒤져 보았지만 분명 내가 몇 달 전에 산 시중에서 파는 구충제가 맞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다리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감각이 없는 하반신을 짚은 채로 굳어버린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내 피부도 뼈도 없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도 그 무엇도 없는 그저 길가에 가득한 그런 단단하고 굵은 몸통을 가진 나무라는 것이 손끝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무. 나무라는 그 단어를 계속해서 곱씹어보았다.

설마.

설마 정말 사라진 걸까?

순간 내 머릿속에 나무가 가득 찼다. 다른 어떤 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였다. 내가 매일 말을 건네고 매일 부러워했던 그 나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맥박이 너무 빨리 뛰는 것이 느껴져 목 부근의 터질 것만 같았다. 오묘한 기분이 변하지 않은 허벅지 부근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휘감았다. 기쁨? 슬픔? 정말 벌레가 사라진 걸까? 그 구충제가 벌레를 없앤 것일까? 설마. 설마 그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왠지 벌레의 꿈틀거림과 그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평소보다 희미한 것 같았다. 더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감각이 고요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거울에 비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부러운 어느 날의 나무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몸이 차갑게 식었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뛰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사라진 것 같은 공허감이 이상하게도 너무나 설레었다.

연차를 냈다. 회사에 입사하고 두 번째다. 3년 전 출근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연차를 낸 이후로 처음이다. 과장님은 나의 연차 소식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내가 미리 연차를 내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무시한 것보다 연차를 냈다는 것 자체를 더 신경 쓰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그 연락에 나는 대충 몸이 안 좋다는 둘러대는 말로 가득한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머리가 차가워지자 이제야 이성적인 사고가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흘러가는 시간과 회사로부터의 연락에 당황해 연차를 내겠다는 의사를 담은 문자를 허겁지겁 보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회사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몸뚱이가 이렇게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회사에 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벌레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회사에 가지 않아도 괴롭지 않을 것이다. 더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면서 앞으로의 미래 같은 것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부족한 능력의 괴리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는 생기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의 나는 그저 시간의 흐름만을 관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축복이다. 신이 나에게 내린 축복. 결국 신은 내가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준 것이다. 어쩌면 매일 같이 퍼부어지는 욕을 더는 견디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신은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가장 원했던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허벅지 밑 종아리까지만 자라있던 나무 기둥은 어느새 골반까지 올라왔다. 손끝은 아주 길고 얇아져 손톱은 없어지고 역시나 거친 표면을 가진 갈색빛의 피부만이 남았다. 더는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단단해진 손가락으로 땅과 연결된 다리의 가장 낮은 곳을 뒤적거려보았다. 다리는 바닥 타일을 뚫고 흙에 파묻혀 있었고 발은 저 밑 어딘가에 길게 뿌리로 자라나 있는 것 같았다. 자그마치 10년을 살았지만 나는 내가 사는 집에 이렇게 깊은 땅이 존재하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깨지고 금이 간 타일과 장판을 보고 있으니 잔뜩 화가 난 집주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벌레가 사라져 걱정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어진 건지 생각보다 부정적인 상상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나는 그냥 기뻤다. 처음에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애매했던 감정은 생각이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기쁨이라는 제 형태를 드러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온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굳어버린 몸으로도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차단되어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도 아니었다. 그저 파도 속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견딜 수가 없어 온몸을 밀려오는 파도에 던지면 몸이 깊은 물 속에서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어느덧 가장 깊은 곳에 닿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고요함. 그러한 고요함에 빠진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물 밖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안과 밖은 얇은 듯 두꺼운 장막으로 나뉘어 있었고 나는 바깥쪽에 존재하는 또 다른 안쪽으로 밀려나 모든 것과 멀어진 3자인 것 같았다. 내가 원하던 안식이었다. 내가 원하던 고요함이었다. 내가 부러워하던 나무의 삶이었다.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소리를 내 웃어보았다. 내 안의 벌레를 자각한 이후로 처음 지어 보이는 거짓 없는 웃음이었다. 아하하하. 웃음은 입에서 벗어난 기포가 되어 공간을 떠다녔다. 물속에서 소리가 멀리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웃음소리 역시 멀리 퍼지지 못하고 희미하게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 작은 감각의 파동마저도 이 공간의 안락함에 더해져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아하하하. 파동에 취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었다. 웃고자 하는 의지 없이도 웃음은 존재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

나무가 되어 버린 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새롭게 알아낸 것이 있다. 알아내고 싶은 의지 같은 것은 딱히 몸 안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먼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몸은 가변의 상태였다. 이를 깨달은 것은 우연이었다.

나무가 되고 나서 시간의 개념은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 자체는 오히려 더 민감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서 있는 나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동안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야에는 공기 중을 부유하는 먼지와 아주 천천히 달라지는 내 몸뚱이만이 들어왔다. 그 덕에 모든 것의 흐름이 아주 느려졌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예 멈춰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비추는 자리로 먼지들이 쉴 새 없이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고 거칠기는 해도 적당한 황색 빛이 돌고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던 피부는 계속해서 색을 잃었고 차갑게 바뀌었다. 골반에서 허리, 허리에서 가슴까지 변했다. 더는 침대에 몸을 뉠 수 없었다. 두 팔 역시 점차 위로 치켜들게 되었다. 하지만 감각이 함께 사라지면서 신체가 느끼는 고통은 없었다. 방바닥에는 개미들이 집을 지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음식 쓰레기 냄새를 맡고 땅을 타고 올라온 녀석들인 것 같았다. 그 애들은 갈라진 바닥 틈새로 드러난 땅에 열심히 집을 짓고 매일 같이 바닥에서 썩어가고 있는 음식물을 그 집으로 날랐다. 그 애들의 움직임 역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중 하나였다. 개미들과 간혹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개미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높은 시야에서도 가장 낮은 곳을 기어 다니는 그들의 퇴화한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저들도 나를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언젠가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부러움을 담은 염원을 빌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다른 존재가 되었다. 전의 삶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전신이라고 해봤자 나무로 변하지 않은 가슴 부분과 상체, 얼굴이 전부였지만 그 작은 부위로도 느낄 수 있었던 그 감각은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무엇이더라, 하고 고민하는 순간 형태를 잃고 조금 뭉툭해진 나의 귀를 타고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익숙하고 혐오스러운 소리였다.

“알람 소리…”

알람 소리가 정적만 가득하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너무 크고 생생해서 나와 다른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하던 얇은 장막을 뚫고 들어왔다. 아주 높은 소리에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경계가 금이 갔다. 시간의 개념이 불쑥 그 틈을 밀고 들어왔고 희미했던 감각들이 나를 덮쳐왔다. 익숙한 불쾌감과 혐오감이 오싹하게 온몸을 감쌌다. 알람을 끄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 소리를 이 공간에서 소멸시키고 싶었다. 알람을 끄고 귀를 막고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알람을 끄고 싶다. 끄고 싶다. 끄고 싶어.

꿈틀

그때 하늘을 바라보는 방향 그대로 끝도 없이 굳어있을 것 같았던 팔이 꿈틀거렸다. 나무로 변해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온기가 돌면서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이자 근육과 뼈마디가 저릿한 느낌이 팔 전체에 퍼졌다. 툭. 팔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원래의 방향을 향했다. 두어번 주먹을 쥐었다 피고 알람 시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하반신은 바닥에 붙어 있어 불편했지만, 허리를 숙여 손을 뻗으니 손끝이 시계의 버튼에 닿았다. 소리가 멎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여전히 소리의 흔적은 방 안에 가득했지만, 그 불쾌감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소리가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5분 정도 귀를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슬며시 손을 떼니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적만이 머물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지니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알람을 끄는 것이 다급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변한 손을 뻗었지만, 평생 나무에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팔이 다시 인간의 것으로 돌아왔다. 움직이는 팔을 보고 있자니 벌레가 다시 몸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졌다. 약해진 살을 비집고 들어와 또 마구 몸을 갉아 먹을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또. 나는 또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괴로움에 매일 몸부림쳐야 하고 이겨낼 수 없는 것을 맞서야 한다. 싫다. 또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싶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얼마 동안은 불안해했지만, 다행히도 팔은 시간이 지나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전보다도 높게 하늘을 향해 굳어버린 거칠고 단단한 가지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덕분에 지금의 몸이 변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은 배가 고프면 몸을 움직여 방을 나가 밥을 먹거나 바닥의 개미들을 위해 음식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익숙해지니 가끔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나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무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어느새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다시 변해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졌다. 몸이 변해가면서 감각은 희미해졌고 그러자 배고픔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가 뻣뻣해져 개미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횟수 역시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제는 정면만 바라보게 되면서 시야가 더 좁아져 개미들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궁금했던 그 존재들 역시도 시간이 지나니 희미해졌다. 벌레의 흔적마저도 하나둘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내 안에 의지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몸에 남겼던 흉터들을 지웠고 끝도 없이 생겨났던 것처럼 끝도 없이 사라졌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이러한 내 몸이 다른 이들에게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연락도 없이 찾아온 동생의 방문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당황하여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났을 때여서 그런지 의지는 쉽게 피어나지 않았고 몸을 바꾸는 것은 전처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희미한 생각만으로는 자유자재로 되지 않았다. 결국 성질 급한 동생 녀석이 스스로 비밀번호를 치고 현관을 들어올 때까지도 나는 내 방바닥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인 채였다. 내 이름을 부르며 거실을 지나쳐 가까이 다가오는 동생의 발자국 소리에 나는 그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학 수사는 필요 없고 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되고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대사들을 머리에 준비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동생은 나무로 변한 저의 형을 보았다기에는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데 문은 왜 안 열어?” 퉁명스러운 말투에 당황하여 나는 멍하니 동생 녀석을 쳐다보았다. 얼굴 근육이 굳어 내가 당황했다는 것이 잘 드러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동생은 그런 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말을 쏘아붙였다. “방 꼬라지가 이게 뭐야? 형, 진짜 미쳤어?” 동생이 발로 방바닥에 깔려있는 쓰레기를 밀어냈다. 그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마 저 발에 개미들의 일주일 치 밥이 짓밟혔을 것이다. 어쩌면 개미들의 집이 짓밟혔을 수도. 언제봐도 참 잔인한 녀석이다. “내가 형 그 회사에서 돈 벌고 나와서 창업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형, 그거 포기한 거 아니었어? 형이 무슨 창업을 해. 설마 지금 그거 준비한다고 회사 안 나가는 거 아니지? 그거 진짜 바보 같은 짓이야. 형도 알지? 엄마 생각은 안 해?”

형,

형! 왜 대답을 안 해?

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열을 주체하지 못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짜증을 내는 너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저 방바닥에 잉여 마냥 누워 네 말을 무시하는 형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너는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는 늘 나에게 화를 냈고 나는 늘 너에게 네가 뭘 아냐고 말했다. 서로 이해하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아, 이제 걱정할 것 하나 없어. 형이 나무가 되었거든. 네 눈에는 안 보일지 몰라도 내 몸통의 반은 갈라진 땅바닥에 박혀 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겨드랑이에서는 쉴새 없이 나무 조각들이 떨어져 어둡게 변한 속살들이 보이고 머리카락마저도 건조하게 마른 나뭇잎마냥 위태롭게 매달려 있단다. 나는 이제 하고 싶은 것이 없어. 네가 그토록 걱정하던 너와 나, 그리고 엄마까지도 갉아 먹던 그 벌레가 내 안에서 사라졌거든. 그러니까, 네가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나는 평생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살 거니까.

하아. 동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짜증을 내도, 질문을 해도 답이 없는 나를 향한 응축된 감정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동생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얼마 전 사라진 입은 쉽게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해도 그 말들은 굳게 닫힌 입 안의 혀끝에서 계속해서 맴돌 뿐이었다. 형 마음대로 해. 결국 방이 후끈해질 정도로 혼자 화를 내던 동생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방 너머로 잔뜩 화가 난 발걸음이 쿵쾅대며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해명하지도 걱정을 덜어주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우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사실 붙잡으려 해도 더는 그런 의지는 생기지도 않았고 그랬기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쩌면 너와 내가 가장 기다렸을 순간인데. 네가 내 실패를 처음 목격했던 그날부터. 내가 그 벌레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그날부터. 그런데 네게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 것은 조금 애석하다. 네가 이 소식을 알면 누구보다 기뻐하며 박수를 칠 텐데. 분명 그럴 텐데.

/

또 흘렀다. 시간을 헤아리려는 의지가 아예 사라졌는지 며칠이 지난건지도 잘 모르겠다. 계속 감고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시야가 어둡다. 창문이 있었던 것 같던 쪽에서 들어오는 햇빛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온몸은 나무로 변한 후로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이제는 그 나무조차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무의 표면이 쉴새 없이 벗겨져 나갔고 속에서 몸통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지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카락에서 변한 나뭇잎은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떨어져 부스러졌다. 거름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스러져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나무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벌레의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남은 몸은 공기 중을 떠다니는 비눗방울 같았다. 툭 치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이 하찮았다.

아침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침에는 유대리가 찾아왔다. 그는 문을 몇 번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자 문밖에서 내 이름을 몇 번 불렀다. 또 답이 없자 현관 앞에서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둥, 승진을 했다는 둥, 모두 기다리고 있다는 둥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유대리는 현관문 밖에 죽을 걸어 두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멀어졌다. 중간중간 유대리의 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어렴풋이 유대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유대리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잘 챙기는 사람이었고. 나는 기회가 된다면 유대리와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을 하고 싶었지? 아, 모르겠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근래는 생각조차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생각을 하다가도 자주 의식이 멀어져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하려는 의지도 사라진 모양이다.

“……서, 몸은 좀 어때?”

어라. 누군가 방 안에 있다. 누구더라. 아, 엄마다. 정말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엄마가 방 안에 들어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을 뜬 것 같은데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얼굴이 어땠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엄마는 바닥에 있는 쓰레기들을 치우는 것 같았다. 바닥에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엄마에게도 나는 역시 나무의 형태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은 아마 더 흉측하게 생겼을 테니까 오히려 다행인 건가.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뭘 하든 몸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엄마, 나는 이제 밥 안 먹어도 돼. 뭘 할 필요도 없어.

“회사는 괜찮아. 4년 넘게 일했는데 이제 조금 쉴 때도 됐지.”

회사도 영원히 쉬어도 돼.

“저번에 회사 그만두고 창업하고 싶다고 했지? 이 기회에 창업 준비해보는 건 어때? 엄마 가게가 요즘 장사가 잘돼서 엄마가 조금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엄마, 진짜 괜찮아. 나 이제 그거 안 하고 싶어. 이제 드디어 하고 싶은 게 없어. 엄마가 나 때문에 더는 힘들지 않아도 돼.

엄마, 좋지? 좋은 거지?

우리 가족 전부 갉아 먹던 벌레가 없어져서 엄마도 좋지?

“엄마는, 행복했어.”

어?

“네가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항상 꿈꾸는 아이라서 엄마는 행복했어. 엄마가 두려워하는 도전을 너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엄마가 그걸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어서 행복했어.”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는 단 한 번도 너 원망한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아들, 언제든, 어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든 엄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엄마는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엄마, 엄마! 가지 말고 대답해줘. 장난이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어? 나의 모든 것을, 엄마의 모든 것을 갉아 먹던 그 회충 같은 벌레 녀석을 엄마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도 안 돼. 엄마가 지금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게 뭐 때문인데. 다른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지 못하는 게 뭐 때문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단 한 번도 날 원망한 적이 없다고? 내가 고집부려서 어려운 형편에도 계속했던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그만뒀을 때도, 투자한 사업이 실패해 엄마가 나 대신 빚을 갚아야 했을 때도, 철없이 또 창업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정말 단 한 번도 날 원망한 적이 없다고? 나조차도 내가 미치게 원망스러웠는데? 실패에도 놓아지지 않는 그 벌레 같이 끈질긴 의지라는 것이, 그럼에도 항상 좌절되는 재능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는데? 엄마, 대답해줘. 엄마도 날 원망스럽게 쳐다봤잖아. 성공하는 다른 자식들을 부러워했잖아. 엄마, 엄마. 정말 원망한 적 없,

/

의식이 흐려졌던가. 눈을 떠보니 어둠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엄마. 엄마를 보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무언가 답을 듣고 싶어…… 아니, 듣고 싶었던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의식이 살아있는 것은 이제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 너무나도 익숙해 잊어버렸지만 잠들어 있는 이곳은 물속이었다. 이제 폐 속에 남아 있는 공기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숨을 뱉어내면 난 다시 조용히 잠들어 더는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인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제는 의지라는 게 존재했던 감각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의지라는 게 어떤 거였지? 나는 무얼 하고 싶어 했더라?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싶지? 엄마로부터 답을 듣고 싶나? 아니면 움직이고 싶나?

아, 아무것도 하고 싶을 수 없구나.

나는 이제,

...

.....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 같던 숨이 우습게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눈을 뜨니 어두웠던 시야가 아주 조금 밝아져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무의 형태를 지니고 있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는 나무가 의지가 없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인가.

애초에 의지가 없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 줌의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먼지조차도 의지가 있었다. 존재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의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안에 남아 있던 유일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의지를 버리고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던 것이 나의 가장 강력한 의지가 되어 끝까지 나의 형태를 유지했다.

아, 밥을 먹고 싶다. 간지러운 발을 긁고 싶다. 나의 안에 벌레가 다시 자리 잡았다. 꿈틀. 그것은 또 쉬지 않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계속해서 나를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이제 그 발자국이 전하는 진동이 마냥 불쾌하지 않다. 그 작은 파동으로 인해 나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고 싶은 것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의지가 몸 안에 가득 들어찼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바닥과 떨어진 발을 움직여 가장 먼저 핸드폰을 켰다. 사람들로부터의 연락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최근에 온 문자를 확인했다.

유대리였다.

‘구대리님, 현관 앞 종이 가방에 구충제도 함께 넣어 놓았어요. 혹시 효과가 있었나요?’

큭큭. 나는 그 문자에 웃음을 터뜨렸다. 확인해보니 정말 그 종이 가방에는 구충제라고 휘갈겨 적은 포스트잇과 함께 작은 약통이 들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유대리에게 답장을 썼다.

‘이제 필요 없어졌어요.’

큭큭큭. 나의 웃음소리에 창밖의 가로수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앞뒤로 바람에 맞추어 넘실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기를 반복하면서 웃었다. 횡단보도 옆 두 번째 자리에 서 있는 그 녀석도 웃었다. 앙상한 가지를 열심히 흔들거리면서 웃었다. 꿈틀꿈틀. 그 녀석의 벌레도 쉬지 않고 꿈틀거렸다.

 

이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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