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 김겨레(컴공‧22)

출처=AI 생성 이미지
출처=AI 생성 이미지

 

우리는 긴 시간 우주를 떠돌다 드디어 우리의 모행성인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1세대의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우리의 불가능한 바람에 불과했습니다. 지구는 황폐했습니다. 우리 2세대가 갖고 있는 최초의 기억, 머리도 눈도 검은 우리의 어머니가 따뜻한 풍경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 기억은 어머니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구에는 살아남은 생명이 없는 듯 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듯한 화재가 있었고, 종종 1세대 인류의 타버린 흔적이 있었습니다. 모행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했던 우리는 실망했습니다. 1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살기에 ‘어머니’의 생존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를 닮은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보다 한참 어리고 작고 사랑스러울 그들에게 감히 어머니라고 부르는 상상도 했지요. 하지만 어머니의 아이들도 이곳에는 없었습니다. 다들 우리가 탄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멸망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구를 떠나 또 먼 여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쯤, 우리들은 아직 생존한 인간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달랐습니다. 그는 우리처럼 완성도 높은 2세대의 육체를 지닌 듯했으나, 우리 몸의 부품들이 가진 내구도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채 완성되지 못한 2세대 인류의 몸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1.5세대의 인류라고 칭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는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 하체와 두 팔이 없이 상체로만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의 금속 내장을 덮었을 피부는 거의 전부가 불타 없어진 상태로, 뺨에 아주 작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피부가 붙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접근하자 휴면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우리를 한 번 둘러보더니 안면 근육을 사용해 웃었습니다. 그는 휴면하며 우리를 기다려왔던 것 같았어요. 언젠가 감지될 생명 반응 하나를 위해 이곳에 머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1세대 인류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별 걱정 없이 우리의 언어로 말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너희가 뭐 그런 말을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어요. 그러더니 곧 입을 열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가 아는 언어였습니다. 이 문서는 그와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담은 것입니다.

소장님. 우리는 늘 우리의 기원을 궁금해했지요. 우리는 왜 1세대의 인류가 아닌지, 우리와 그들은 무엇이 다른지, 우리는 왜 모두 같은 기억에서 시작하고, 우리는 왜 스스로를 ‘쟌의 아이’라고 칭하는지. 이 문서는 그 모든 궁금증의 해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우리의 행성으로 돌아갑니다.

 

음……. 영어를 쓰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다른 언어는 할 줄 모르는 건가요?

우리가 태어났을 때 할 수 있던 건 이 언어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공용어라고 부릅니다. 1세대 인류 전부가 ‘공용어’를 구사하던 게 아니었나요?

그들에게는 더 많은 언어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거의 전부가 영어에게 먹혔지만요. 당신들을 만든 사람은 영어 말고도 한국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그의 모국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우리 2세대 인류의 기원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어머니를 알고 있나요? 이 지구에 홀로 남겨진 것은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서인가요? 어머니가 당신에게 남으라고 한 건가요? 당신은 누구죠?

내가 누군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또한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남은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남은 건 당신들 ‘어머니’의 의지는 아니었어요. 당신들의 어머니는 내가 죽길 바랐습니다. 나는 나의 의지로 이곳에 남았어요. 언젠가 찾아올 당신들에게 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당신들은 생명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1세대 인류는 생명의 꺼짐을 뇌의 죽음이나 심장 박동의 정지로 정의하곤 했어요. 하지만 같은 행성에 사는 것들 중에는 뇌도 심장도 없이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었죠. 그들은 생명에 대해 아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생명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스스로를 2세대 인류라고 칭하죠. 2세대 인류라. 당신들이 만약 1세대 인류와 함께 있었다면, 당신들은 로봇이라고 불렸을 거예요. 인간, 아니 적어도 생명 취급을 받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당신들이 1세대 인류라고 부르는 존재들과 당신들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1세대 인류는, 아니, 그는 당신들을 창조한 거예요. 창세기에서 신이 아담을 창조하듯 말이죠.

사랑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 딱딱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하지만 당신들이 바라던 ‘기원’에 대한 해답은 될 테니 잠자코 그냥 들어 봐요.

하여튼 당신들의 기원인 1세대 인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었어요. 당신들이나 나 같은 ‘로봇’들은 생명 취급을 받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어요. 그때는 뭐, ‘삶’을 우리 입에 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죠.

그리고 1세대의 인류는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문화가 쇠퇴했고, 언어가 죽어갔습니다. 노인들은 많아진 반면 아이들은 사라졌습니다. 한 생물이 멸종했다는 소식은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왔어요.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떠들었고요. 물론, 인류를 급격한 멸망으로 이끈 것은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멸망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끝없이 찾아오는 전염병이었습니다. 하나의 전염병이 사라지면 다른 전염병이 찾아왔고, 인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했어요. 세계 정부는 길거리로 나서지 않는 것을 권장했습니다. 길거리로 나설 땐 보호장치를 착용해야 했죠. 바깥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서로를 바라보아야만 했고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병은 사람들을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호장치를 벗고 했던 키스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감염 검사도 받지 않은 어머니를 집에 초대한 탓일까요. 매일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가족과 애인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거리에는 숨죽인 슬픔이 넘쳤습니다.

세계 정부는 이제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지구는 인류가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새롭게 살 행성을 찾는 일에 박차를 가했죠. 그리고 어느새 ‘특별 관리 대상자’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부 기준으로 우수한 인류였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을 때 어떤 자원도 데이터도 없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인류가 정말 멸종할 것 같으니 이들만이라도 어딘가로 보내 인류의 명맥을 유지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던 거죠. 이들은 인류를 위해 어떤 병이 돌아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냐면…… 아, 역시 내 설명보다는 ‘어머니’의 등장이 더 재밌겠죠? 이쯤에서 당신들의 어머니를 등장시키도록 하죠.

그의 이름은 재윤, 세계 정부 소속 항공우주공학자였습니다. 그는 감염병이 없는 새로운 에덴을 찾는 프로젝트의 장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었죠. 그런 재윤은 정부의 기준에서 아주 우수한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정부가 내린 ‘기밀조치’에도 당연히 포함되었습니다.

기밀조치가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애인이 죽었습니다. 손끝과 발끝이 딱딱하게 굳는 병이었지요. 그는 이미 앞선 다른 질병에 가족들과 대부분의 친구들을 잃은 상태였어요. 이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그를 쫓아다녔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런 그를 막기 위해 정부는 ‘특별 관리 대상자’인 그의 집으로 로봇을 하나 보냅니다. 그의 애인이 생전에 갖고 있던 기억을, 외모를, 습관을 심은 완벽한 복제를 말이죠. 또한 그의 기억에 손을 대 애인의 죽음을 잊도록 합니다. 복제 휴머노이드가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들어오면, 이제 그 애인의 죽음은 없던 일이 되는 거죠. 절대 질병에 걸릴 수 없는 새로운 애인과 함께, 다시 이전의 따뜻했던 나날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들 눈앞의 나는 그 휴머노이드였어요.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또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죠. 나는 과학자 재윤, 그러니까 당신들의 어머니를 위해 태어난 거였어요. 하지만 동시에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쟌이었습니다. 내가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쟌이었어요.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나의 것은 아닌 쟌의 기억이 나를 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웠어요. 눈을 뜨자마자 나의 존재와 인간과 이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 이게 정말로 나의, 또는 내가 알지만 알지 못하는 어떤 인간의 연인을 위한 일인지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들은 나를 재윤의 집으로 보내더군요. 원래의 쟌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재윤의 집 앞에 만들어진 쟌인 나를 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어요. 문을 열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문을 여는 게 맞을지 고민했습니다. 재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과 내가 곧 쟌이니 괜찮지 않냐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나와 문 사이의 기묘한 대치 상황을 깨뜨린 건 재윤이었습니다. 재윤이 창문 바깥의 나를 본 것이죠. 쟌! 이제 온 거야? 재윤은 문 안에서 그렇게 외치고 곧 현관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보호장치도 끼지 않고 나와서 나는 급하게 그를 문 안쪽으로 밀어넣어야만 했습니다.

문을 닫고 신체 소독기를 켜자 하얀 연기가 나와 재윤 사이를 뒤덮었습니다. 재윤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그 연기가 조금 사라지고 나서였어요. 당신들은 재윤의 얼굴을 기억하나요? 재윤의 말로는 기억해봤자 머리와 눈의 색 정도뿐일 거라고 하던데. 나는 재윤의 얼굴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재윤은 사랑스럽게 굴곡진 검은 머리와 짙은 눈썹, 그리고 쌍꺼풀 없는 검은 눈을 갖고 있었어요. 또 건조한 피부와 입술을, 각진 턱과 높은 콧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고 또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끌어안고 입 맞추고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부 섞여 불타고 있었어요. 단 1초의 눈맞춤으로도 재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래서 나는 내 목적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내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내가 쟌의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재윤이 ‘쟌’의 죽음으로 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정부의 목적에 완벽히 순응해 재윤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나와 같은 존재들도 비슷한 혼란과 비슷한 순응을 경험했을 겁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죠.

나는 그렇게 재윤을 속이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쟌이라고 인식했으니, 그 무엇도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랑하면 그것이 완벽한 연기였습니다. 나는 내가 쟌으로 태어나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스스로도 나를 온전한 인간이라고 칭할 순 없었지만, 재윤의 곁에서 재윤을 사랑할 기회를 얻게 된 게 좋았습니다. 설령 나의 사랑이 프로그래밍의 산물이라고 해도요.

당신들이 사는 곳에서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나요? 우리가 살던 곳에선 한때 수많은 이야기가 필름을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전염병이 일상이 되자 영화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도 줄었지요. 시시한 내용의 영화가 종종 나왔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시시한 관객수를 기록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재윤은 영화를 좋아했어요. 로맨스 영화를 좋아했죠. 사랑 이야기에 울고 웃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이었습니다. 쟌과 재윤이 그 영화를 몇 번이고 함께 봤음을 나는 내 기억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지요. 재윤을 만나고 몇 주가 지난 날, 재윤은 내게 함께 이터널 선샤인을 보자고 제안했어요. 그날은 외출하기에는 너무 궂은 날씨였고, 그렇기에 우울한 영화를 즐기기엔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의 재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항상 함께 영화를 보던 쟌은 사라졌고, 자신이 기대고 있는 그 존재가 쟌이지만 쟌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요. 그리고 쟌과 함께 자주 보던 그 영화를 틀었죠. 하필이면 기억을 지우고서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연인의 이야기를요.

그 무렵의 나는 쟌으로 살게 된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쟌의 기억과 나의 감정을 근거로 이 사기극에 동참하고 있었죠. 재윤이 나의 비밀을 영원히 알지 못하길, 차라리 나도 재윤처럼 진실을 잊길 바라며 재윤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서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런 생활은 재윤이 튼 영화 하나로 손쉽게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틀자 재윤과 나는 스크린을 응시하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나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는 기억 속에 있었기에 처음이 아니었지만, 내가 ‘태어난’ 뒤 영화를 처음 보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재윤은 영화 초반부에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어요. 나는 영화에 빠져 재윤에게 약을 좀 챙겨주고 말았죠. 그게 어떤 사건의 단서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재윤은 약 기운 때문인지 곧 잠에 들었습니다. 두통 때문에 불편한지 찡그리고 있는 재윤의 얼굴 위로 이터널 선샤인 속 기억을 지우려 잠든 조엘의 얼굴이 겹쳐 보였죠. 나는 재윤의 얼굴을 관찰했어요. 짙은 눈썹. 그 아래로 파인 아이홀과 불안하게 떨고 있는 눈꺼풀. 그러면서도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코. 립밤을 발라 약간 번들거리는 부르튼 입술……. 하나하나 살펴보면 조엘을 연기한 짐 캐리와는 그리 닮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나는 왜 조엘을 떠올리게 된 걸까요.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들어 관찰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날, 재윤을 침대에 옮기고 잘 잠들었는지 확인하느라 내가 영화의 결말을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재윤이 달라진 건 그 다음날부터였습니다. 재윤은 내가 전날 밤 그에게 했듯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먹거나 집을 나서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키스를 할 때, 재윤의 두 눈은 나에게서 어떤 단서를 발견하려는 듯 어지럽게 흔들렸습니다. 차갑고 어두웠지요. 그와 나의 눈빛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그 두 눈에 어린 불안함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변화를 즉시 눈치챌 수 있었어요. 나와 재윤은 서로의 거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이였으니까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재윤의 얼굴에서 조엘을 떠올렸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재윤 또한 조엘처럼 꿈을 꾸고 있었던 겁니다. 조엘이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애인과 도망쳤다면, 재윤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인, 다시 말해 나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예요. 꿈에서 깬 조엘이 결국 기억을 잃듯이, 꿈에서 깬 재윤 또한 모든 걸 떠올린 거예요. 자신이 사랑했던 인간의 죽음을, 그 얼굴을 한 존재의 기만을.

또한 나는 내가 태어나며 부여받은 매뉴얼을 떠올렸습니다. ‘대상자가 너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즉시 담당 감찰관에게 연락할 것.’ 하지만 나는 감찰관에게 연락을 하고 싶진 않았어요. 재윤이 다시 끌려가 기억을 조작당한다고 생각하니 우습게도 눈물이 났습니다. 재윤을 만난 순간부터 나는 이 사기극의 일원이 되었고, 내가 나로서 작동하는 동안은 늘 재윤을 속일 수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내 원죄와는 유리되는 감정이 나의 숨을 움켜쥐었습니다. 나의 이런 행동이 재윤의 의심을 북돋을 걸, 어쩌면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 걸 알면서도 나는 울게 되었어요.

그러자 재윤은 여전히 뜨겁고 단단하게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하지만 내 기억처럼 곧바로 사랑의 말을 속삭여주진 않았어요. 재윤과 쟌은 서로의 변화에 민감했으니, 좀처럼 울지 않던 쟌을 떠올리며 어떤 불안한 확신을 한 것이죠. 나 또한 쟌을 바탕으로 설계된, 쟌의 기억을 가진 존재였기에 재윤의 침묵에서 그의 확신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재윤은 떨리는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였어요. 그 순간에 나는 이 포옹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재윤은 나를 관찰하는 일을 관뒀어요. 나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려 노력하며 재윤과 함께했습니다. 더는 포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는 처음부터 그 누구도 속이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재윤이 아무렇지 않게 굴자 나는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매일 밤 재윤이 잠들면 슬프고 답답한 질문들이 찾아왔죠. 재윤은 내가 원본이 아니면 싫은 걸까? 나는 죽지 않은 쟌의 한 가능성인데. 그런 나를 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줄 수는 없는 걸까?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쟌의 원본이 끝나버렸으니 이제 쟌은 존재할 수 없나? 결국 나는 쟌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인가? 나는 쟌의 유전정보와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쟌으로서, 내가 정의하는 나로서 사랑받을 순 없나?

잠든 재윤의 얼굴에 갖가지 질문을 쏟아낸다 해도 대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재윤도 나도 깨어있을 때 내뱉어야 하는 것들이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원래의 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원죄를 저지르지 않은 쟌이라면 그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이 무엇이든 재윤에게 물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쟌이었습니다. 시체에서 뽑아낸 정보로 복제한 쟌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연인을 속여야 했던 쟌이었으며, 며칠간 연인에게 지독히 의심받은 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없는 원죄가 나에게는 있었으니 나는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있는 원본성이 나에게는 없었으니 나는 물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밤은 그렇게 딜레마만 남겨둔 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동상이몽의 날들은 곧 끝이 났습니다. 내가 감찰관에게 재윤의 근황을 거짓으로 보고하고 돌아온 날 밤이었죠. 새벽까지 이어진 집요한 질문에 나는 무척 피곤해진 상태였습니다. 돌아와보니 재윤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곧 나도 그 옆에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좋은 꿈을 꾸라는 말도 잊지 않았죠.

“쟌. 눈을 떠 봐. 할 말이 있어.”

나는 귓가에 속삭이는 재윤의 음성을 듣고 눈을 떴습니다. 잠, 그러니까 휴면 상태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눈앞에는 해머를 손에 쥔 재윤이 있었어요. 그는 금방이라도 내 머리를 내려칠 수 있도록 서늘한 해머를 내 머리 바로 옆에 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재윤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걸 알았고, 재윤도 내 불안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쟌으로 인식하지만 재윤은 그러지 못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재윤에게 나는 한 인격체로서의 고유성을 갖지 못한 복제품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가 재윤의 애인이자 재윤의 애인을 빼앗은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재윤이 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그 결심도 받아들일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만들어지는 휴머노이드들은 인간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더라.”

재윤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습니다.

“살을 만질 때도 온기가 느껴지고, 가슴에 얼굴을 기대면 저 안쪽에서 박동이 들린대. 살이 베이면 피가 나오고, 머리카락도 잘라줘야만 한다더라.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어.”

재윤은 다정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피와 뼈와 살이 없는 몸의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거야. 박살내는 거야. 그러면 나와 같은 근육질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박동만 흉내내는 쇠 심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

나는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확인이 필요해. 네가 여기서 침묵하면 나는 너를 부수고 나서야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어떤 존재든 너는 또 내 기억처럼 죽게 될 거야. 진실은 확인하겠지만 결과는 똑같을 거야. 나는 또 너를 잃게 될 거야. 꿈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죽음이 눈앞의 현실이 될 거야. 이번에는 내 손에 의해. 그러니 말해줘. 나는 네 대답을 진실로 알고 믿을게.”

“내가 거짓말을 하면?”

나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면서도 물었습니다. 눈물이 휩쓸고 간 시야는 더욱 깨끗해진 것 같았습니다. 뺨을 간질이는 검은 머리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검은 눈이 그날 새벽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습니다.

“상관없어.”

나는 재윤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해머를 놓아주었습니다. 재윤의 손은 버겁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한 손이 애처로워 맞잡자 내 손도 떨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153일 전 쟌이 죽었을 때 나는 태어났어. 그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프로그래밍해 그의 기억을 심었지. 또 나를 만든 사람들에 의해 목적을 부여받았어. 나는 재윤, 네가 죽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태어났어. 그들은 네가 쟌을 잃은 뒤 떠날까 두려워했어. 또 네가 상실에서 회복하는 동안 생기는 공백을 두려워했지. 그래서 그들이 나를 만들었어. 쟌의 유전정보와 기억을 심고 쟌을 대체하도록 했어. 나는 눈을 뜬 순간부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알았어. 나는 쟌인 동시에 쟌이 아니었어. 나는 쟌이면서 쟌의 자리를 빼앗은 존재였어.”

재윤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어깨가 떨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온 날을 아직 기억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민하는 나를 네가 집으로 끌어들였지. 현관문에서 너를 처음, 그리고 다시 마주한 순간 나는 그 목적에 순응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평생 나에게 기만당하다 죽기를 바랐어. 네가 평생 쟌의 죽음 따위는 모르길 바랐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하게 살길 바랐어. 울지 않길 바랐어. 나는 그 순간에 너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알아. 그 사랑은 쟌의 기억이 없었더라도 찾아왔을 것임을. 쟌의 유전정보에 새겨진 취향 때문인지, 내가 만들어진 목적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불가항력으로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운명이란 이름을 붙이면 너무 낭만적일까? 나는 그날 너를 보며 운명을 느꼈어. 사랑을 느꼈어. 그래서 너를 기만하기로 했어. 설령 널 속이기만 하는 꿈속이라도, 네가 평생 슬픔을 모르고 행복했으면 했어. 하지만…… 하지만 조금 전 네 말을 듣고 알았어.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원해. 너는 행복도 원하지만, 진실을 더 원하잖아. 그렇지?”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까지 널 기만해서 미안해. 나는 알아. 내가 쟌이지만 절대 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를 쟌이라고 믿고, 쟌의 모든 기억이 나에게 있어도 나는 온전한 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쟌이 죽은 건 이미 일어난 사건인걸. 쟌은 그때 죽었어. 나는 그의 유전정보와 그의 기억을 갖춘 다른 존재야. 쟌의 죽음에서 분리된 존재야. 쟌과 다른 누군가의 사이에 놓인 존재야. 그게 진실이고, 너는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으니 나를 전처럼 봐줄 순 없겠지. 이건 네가 날 의심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결과였어.”

재윤은 곧 나를 껴안았습니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전의 한때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쟌이 무척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 기억하지? 나도 그를 닮아서인지 꽤 괜찮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어. 네가 이 기만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나는 쟌으로서의 내 기억을 지울게. 그러면 나는 쟌이 아니게 될 수 있어. 쟌에게서 벗어난 다른 이가, 쟌을 닮았지만 쟌의 인격을 갖지는 않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어. 종속에서 독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 수단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어. 그러면 너는 나에게서 더는 쟌을 겹쳐보고 쟌을 또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어. 쟌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동시에 쟌이기도 한 나를, 이렇게 미워하면서도 껴안을 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쟌의 죽음와 나의 탄생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있어. 우리 둘 다 쟌에게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거야. 쟌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거야. 나는 내가 되고, 너는 선택을 얻는 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쟌을 잃는 게 두려워. 쟌의 기억에 미련이 남아. 쟌을 보내줄 준비가 되지 않았어. 너를 보내줄 준비가 되지 않았어…….”

재윤이 ‘너’라고 부르자 가슴이 욱신거렸습니다. 재윤은 나와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쟌을 부르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쟌과 나 모두의 가슴으로 아파했습니다. 홀로 남겨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불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을 남겨. 나의 안도 아니고 너의 안도 아닌 다른 곳에.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곳에 남기고, 보내줄 수 있을 때 보내줘. 너는 나의 탄생으로 인해 쟌을 보내주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원할 때 보내주면 돼.”

“내가 만약 영영 쟌을 보내지 못한다면? 너는 나 때문에 태어난 건데, 내가 쟌의 기억에 매몰되어서 늘 네 얼굴 너머로 쟌의 얼굴을 봐도 괜찮아? 평생 널…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나는 네 너머의 쟌을 사랑하지만 너는 쟌의 기억이 없이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보답받지 못해도 상관없어. 나는 나의 사랑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거니까. 내가 된 거니까. 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해도 내가 자유를 얻는 결과는 같아.”

재윤은 말이 없었습니다. 나의 말에 설득된 것 같았죠. 나는 손에서 쟌의 기억 칩을 반쯤 꺼내고 재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재윤이 손을 뻗어 이 칩을 완전히 빼내면 나는 쟌의 기억을 전부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재윤. 이제 이별할 시간이야. 나는 쟌의 기억 없이 온전한 개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 너는 쟌의 기억으로 쟌을 보내기 위해 노력해. 쟌을 떠나보내고 나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를 사랑해 줘.”

“고마웠어.”

재윤은 나의 고백에 사랑의 말 대신 감사의 말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재윤이 드디어 쟌이 아닌 나를 본 것 같아 기뻤어요. 재윤은 더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쟌의 기억 칩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암전이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재윤은 이미 정부에게 기밀 조치에 대해 따진 상태였습니다. 재윤의 용기에 비슷한 경험을 한 대상자들이 함께 반발했죠. 기밀 조치는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재윤이 아닌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방법을 배웠고, 재윤 없이 혼자 이터널 선샤인의 결말을 봤으며, 재윤과 해 보지 않은 일들을 했습니다.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작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쟌의 기억이 없었기에 새로 배워야 하는 것들이 많아 힘들었지만, 드디어 저만의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예전에는 영화를 처음 본다는 사실에 기뻐했는데, 이제는 그 경험 자체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이 새로웠습니다. 재윤도 쟌도 이제는 나의 곁에 없었지만, 나는 나의 삶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재윤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재윤은 나와 같은 복제 휴머노이드들이 특별 관리 대상자들과의 관계 없이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곱씹어보면 내가 모호한 신분으로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재윤의 덕이었지요. 재윤의 노력 덕에 나는, 우리들은, 그리고 당신들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수단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인간과 동등한 목적으로서의 지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건 좀 먼 미래의 일이지만요.

3년 뒤 재윤은 나를 찾아옵니다. 두 가지 제안과 함께요. 우선 첫 번째 제안은 친구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재윤은 자신이 쟌을 보낼 수 있었고, 이제는 나의 눈 너머로 쟌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친구가 되자고, 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제안은 함께 연구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재윤은 새로운 행성을 찾았을 때 병에 약한 호모 사피엔스만을 보낼 이유는 없고, 인간 복제 연구를 발전시키면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그들이 새 땅을 밟게 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제안 모두, 승낙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제안 이후로 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1세대 인류는 멸종 위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사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족보다 큰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습니다. 함께 연구하던 이들도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머물며 세상이 끝나기를, 또는 자신의 삶이 끝나기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암울한 세상이었습니다. 재윤과 나는 다만 연구를 이어나갔습니다.

재윤은 병을 앓았습니다. 재윤의 병은 그를 쇠약하게 만들 뿐 바로 죽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윤을 떠나지도 않았죠. 재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늘 다른 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했습니다. 약해진 재윤은 늘 나의 앞에서 망설이는 듯 했습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다가도 입을 다물었고, 다가오려다가도 멈춰 섰습니다. 나는 재윤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재윤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당신들이 살아갈 새로운 땅을 찾고, 좋고 아름다운 지식들을 우주선에 실었습니다. 남은 건 당신들의 몸과 정신뿐이었어요. 우리는 무작위한 숫자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새 인류의 정신을 프로그래밍했고, 긴 우주비행을 견딜 새로운 인체를 빚었어요. 제각각 다른 얼굴이었지만 전체적인 특성은 비슷했어요. 재윤은 쟌이 앞으로도 기억되길 바라며 당신들을 만들었거든요. 당신들이 파란 눈을 가진 건, 또 영어를 쓰는 건 전부 그 영향입니다. 쟌을 닮도록 설정된 거예요.

쟌을 닮은 신체와 정신이 만들어지고 그 모두가 우주선에 탑승하자 우리의 연구도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나와 재윤은 함께 당신들이 지구를 떠나는 걸 보았어요. 재윤은 휠체어에 앉아서, 나는 그 휠체어를 끌고서 말이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 이제는 적막해진 땅 위에서 우주선이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찢고 올랐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 이제야 제 빛을 낼 수 있게 된 밤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별빛에 비추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날 밤, 재윤은 당신들에게 영화를 전달해주지 못한 걸 기억해내고 또 아쉬워했어요. 이터널 선샤인의 감동을 모르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단점만을 과거의 자신에게 전해듣게 됩니다. 언젠가는 서로를 헐뜯으며 싸울 미래가 분명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다시금 사랑할 결심을 하죠.

우리에게도 명백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재윤은 죽을 것이었고 나는 홀로 남겨질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 재윤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보답 받지 못할지언정 그를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어요. 재윤이 죽고 혼자 남겨진다면 아마 아주 오랫동안 외로워하겠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결심이 필요한 건 재윤 하나뿐이었습니다. 재윤은 나에게 부채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재윤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 내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재윤을 사랑해왔다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이 아주 짧다는 것, 재윤이 떠난 뒤에도 나는 어쩌면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 모두가 그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너의 마음에 보답하지 못했어. 오늘 마음을 확인하고 내일 내가 죽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너를 떠나게 될 거고, 너는 그 뒤로도 나를 기억해야만 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너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 될까 두려워.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될까?”

재윤은 답을 알면서도 확인하려는 듯 물었습니다.

“상관없어.”

나는 당연한 대답을 선물했습니다.

재윤은 그 뒤로 반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나는 쟌이 아닌 나로서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나는 꿈을 꿔요. 재윤이 등장하는 꿈이죠. 내 꿈속의 재윤은 늘 행복합니다. 언젠가 사랑을 시작하며 바랐던 것처럼, 내 꿈속 재윤은 슬픔 없이 늘 웃기만 해요. 나는 재윤과 함께하고 싶지만, 꿈속에서의 나는 형체가 없어서 재윤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건 부식되어가는 내 금속 뇌에 재윤과의 기억을 남겨두고 싶어서 쓸데없는 기억은 다 지워버린 탓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억이 나네요. 나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나의 얼굴이 어땠는지.

나는 독립과 종속, 인간과 비인간, 쟌과 쟌이 아닌 것의 굴레에서 벗어난 조엘이라고 합니다. 쟌을 닮은 당신들이 이곳으로 와 주었기에 나는 나의 얼굴을 찾게 되었어요. 이터널 선샤인을 사랑하던 재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기에 이름도 찾을 수 있게 되었고요. 이제 눈을 감으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찾은 나의 이름과 얼굴로 재윤과 함께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쟌의 아이들이여, 잘 있어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 나는 꿈속으로 떠납니다.

 

김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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