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순 작가의 점자촉각그림책 ‘점이 모여 모여’.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엄정순 작가의 점자촉각그림책 ‘점이 모여 모여’. 안정연 사진기자

 '읽는다’보다 ‘느낀다’는 표현이 더욱 잘 어울리는 책이 있다. ‘점자촉각책’이다. 하얀 배경에 점자가 가득한 일반적인 점자책과 달리, 이미지를 올록볼록하게 인쇄해 손으로 느낄 수 있다. 국내 최초 점자촉각책 ‘점이 모여모여’는 2008년, 엄정순(서양화·83년졸)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시각장애 아동의 미술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그는 ‘점이 모여모여’ 이후에도 청각, 후각 등을 더한 점자촉각책을 만들며, 시각장애 아동뿐 아니라 비시각장애인도 다양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느낄 수 있길 꿈꾼다.

 

예술은 질문으로부터

엄 작가는 스스로를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뒤, 다른 이들도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예술가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그를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단순한 질문임에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던 그는 반대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안 보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장애인이 떠올랐다. 엄 작가는 일본의 한 전시에서 시각장애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봤다. 그들은 보이지 않음에도 보이는 것을 만들어 냈다. 당시 한국은 시각장애인이 예술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웠던 1990년대였다. 엄 작가는 이들을 만난 뒤, 국내에서 시각장애인과의 예술 협업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엄정순 작가가 서울 맹학교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엄정순 작가가 서울 맹학교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1997년, 엄 작가의 첫 파트너는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는 지방의 맹학교에서 미술 자원봉사를 했다. 그가 처음 맹학교에 발을 들였을 때, 미술 시간은 ‘필요 없는 시간’으로 여겨졌다. 교육과정에는 존재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미술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었다. 학교에서는 “(미술은) 돈벌이도 안 되고, 직업도 안 될 텐데 그 시간에 영어나 마사지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엄 작가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교를 설득했다.

껍데기에 불과하던 미술 시간은 질문이 넘치는 수업 시간이 됐다. 그는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영감을 얻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그에게 물었다.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왜 누구는 예쁘다 하고 누구는 못났다고 해요?”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던 아이에게는 시각적 정보가 단 하나도 없다. 엄 작가는 학생의 질문을 이렇게 추측했다. ‘촉각으로 본 얼굴은 피부의 부드러움, 딱딱한 이빨, 머리와 피부에 난 털 등이다. 사람마다 미묘한 촉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이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이 될 것인가?’ 엄 작가는 “눈이 확 트이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아이들의 질문을 통해 생각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얻은 것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이미지

1998년 맹학교의 도서관을 방문한 엄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도서관은 작은 방에 덩그러니 놓인 점자책 몇 권이 전부였다. “세상이 온통 이미지인데, 아이들은 안 보인다는 이유로 미술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었어요.” 일반 활자 책에 인쇄돼 있는 그림을 시각장애 아동들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 작가는 ‘이미지를 촉각으로 볼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종이 등을 잘라 직접 교재를 만들었다. 함께 감각책을 연구하던 독립편집자가 창비 출판사에 엄 작가의 책을 소개했다. 마침 어린이 도서 30주년을 맞아 ‘시각장애 아동들에게 책 읽는 기쁨’을 전하고자 했던 창비출판사와 뜻이 모였고, 국내 최초 점자 촉각 그림책 ‘점이 모여모여’(2008)가 세상에 나왔다.

점이 모여 동그라미를 이루는 과정을 손끝으로 알아볼 수 있는 점자촉각책 '점이 모여 모여'.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점이 모여 동그라미를 이루는 과정을 손끝으로 알아볼 수 있는 점자촉각책 '점이 모여 모여'. 안정연 사진기자

 책은 첫 페이지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시작한다. 하나의 점은 모이고 모여 선이 된다. 이 선은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며 하나의 높은 음자리표가 되기도 하고, 하트 모양이 되기도 한다. 평평한 종이 위에 올록볼록하게 인쇄된 점과 선을 손으로 느끼고 배우는 과정은 엄 작가의 말처럼 시각장애 아동들에게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됐다.

 

더 넓은 세상을 위한 예술

올해 7월 ‘점이 모여모여’는 10쇄를 찍어냈다. 주요 소비자는 시각장애인 아동과 그 양육자가 아닌, 비시각장애인 아이를 둔 젊은 양육자들이었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에 좋다는 이유였다. 엄 작가는 “소수와 함께했던 프로젝트를 다수가 누릴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하는 것도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만지며 읽는 패션 촉각책, ‘TOUCH me, WEAR me_여인의 향기’. 출간된 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향기가 나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만지며 읽는 패션 촉각책, ‘TOUCH me, WEAR me_여인의 향기’. 출간된 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향기가 나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그는 점자촉각책에 시각과 촉각 외에도 다른 감각들을 넣어보고자 다양한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TOUCH me, WEAR me-여인의 향기’(2014)에는 영화 ‘여인의 향기’(1993)의 한 장면을 시각, 촉각, 후각을 사용해 담아냈다.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는 책에 고체 향수를 붙여 후각을 담았다. 엄 작가가 보여준 책은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한 비누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촉각은 주인공들이 입은 의상의 옷감을 책에 붙여 표현했다. 책을 만지면 눈앞에 영화 속 장면이 생생히 그려진다. 엄 작가는 “(비시각장애인인) 우리는 너무 눈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을 안 쓴다고 생각할 뿐”이라며 “점자촉각책을 통해 다른 감각들을 의식화한다면 세상을 훨씬 예민하고 즐겁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만지며 읽는 패션 촉각책, ‘TOUCH me, WEAR me_여인의 향기’.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정장 옷감을 만져볼 수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만지며 읽는 패션 촉각책, ‘TOUCH me, WEAR me_여인의 향기’.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정장 옷감을 만져볼 수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그는 1996년 사단 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해 시각장애인과의 예술 프로젝트를 지속해 오고 있다. 자원봉사자로서 맹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진행하는 등의 활동이 있다. 엄 작가의 관심은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이들과 뜻을 맞추는 것에 있다. 많은 사람이 ‘우리들의 눈’을 찾아왔으나 대다수가 장애인 돕는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엄 작가는 시각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시각장애인은 다른 인지 방식을 사용해 색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예술적 파트너’다.

훌륭한 인쇄술로 구현된 점자와 그림들. 두꺼운 종이 위로 톡톡하게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나비의 성장과정을 학습할 수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훌륭한 인쇄술로 구현된 점자와 그림들. 두꺼운 종이 위로 톡톡하게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나비의 성장과정을 학습할 수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현재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미지를 담아낸 ‘사계절 자연 도감’을 준비하고 있다. 말로만 들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과학지식인 ‘나비의 성장’, ‘물의 순환’ 등을 시각장애 아동들이 손끝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엄 작가는 시각장애 아동들의 교육에, 시각장애 아동은 엄 작가의 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손으로 만지는 것도 점과 선에 불과하지만, (시각 장애 아동들에게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엄정순 작가가 그의 예술적 필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뒤로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엄정순 작가가 그의 예술적 필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뒤로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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