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상연 중인 무대 위, 수어통역사가 있다. 배우 옆에서 그림자처럼 호흡을 맞추며 함께 울고, 웃고 때론 신나게 춤도 춘다. 뉴스나 행사에서의 절제된 수어통역을 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은 낯설지도 모른다. 그동안 수많은 ◆배리어프리(barrier-free) 연극 무대 위에 섰던 공인수어통번역 ‘잘함’의 김홍남, 최황순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이른 저녁,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인터뷰 질문에 답하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손짓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그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으로 듣고, 손으로 말하는 신기한 언어

“음성도, 활자도 아닌 특별한 언어인 수어가 암호나 퍼즐을 푸는 것처럼 새롭고 재밌었어요.” 최씨는 사회인 동호회에서 수어를 공부했다. 김씨는 지인의 권유로 청각장애인 복지관을 찾아가면서 수어를 처음 접했다. 맨 뒷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듣던 수업이 지루해질 즈음 그는 동호회에 들어갔다. 청각장애인과 직접 소통하며 수어의 세계에 빠졌다. 그 뒤 둘은 민간수어통역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들의 수어 통역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수어 통역의 시작은 수어가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김씨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만화였다. 시각적으로 정지된 장면이 연속성을 지니면서 하나의 동선을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경험은 수어 표현에 많은 도움이 됐다. 최씨는 “광고 분석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광고에선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는 장면만을 사용하기에 강렬한 표현을 위한 동작을 연구하기 좋은 방법이다.

소리로 대화할 땐 간단한 표현이, 몸으로 표현할 땐 다양해지기도 한다. 연극 대사 중 “먹었어”를 수어로 번역하려면 무엇을 먹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수박을 먹었는지, 밥을 먹었는지에 따라 동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어엔 주어나 목적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 표현이 있다. 김씨는 “이때 연출님이나 작가님을 붙잡고 대체 이 인물이 뭘 먹고 온 거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어로 ‘이화’,’학교’를 표현하고 있는 최황순 (왼쪽), 김홍남 수어통역사. 권아영 사진기자

 

무대 위에 있지만 없는 것처럼 

배리어프리 연극의 연습 과정은 어떨까. 먼저 대본을 수어로 번역한다. 이때 정확한 대본 이해를 위해 배우나 연출, 작가와 지속적인 소통은 필수다. 대본에서 다 알 수 없는 정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연습을 꾸준히 참관한다. 연출과 배우에게 디렉팅과 연기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이후 배우와 합을 맞추기 위해 직접 연습에 참여한다. 수어통역사는 번역가와 통역사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기에 엄청난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수어통역사는 배우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으며 모든 객석에서 수어가 잘 보이는 각도를 찾는다. 원하는 자리에 서기 위해 계속해서 연출과 배우를 설득한다. 최씨는 “배우의 대사가 안 들리는 연극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배리어프리 연극에서 수어가 보이지 않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저희는 어디서나 보여야 하지만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존재라 동선을 짜는 게 항상 어렵다”고 말했다.

이들이 동선 못지않게 신경 쓰는 부분은 캐릭터 간의 구분이다. 배우보다 수어통역사 수가 적기에 한 명의 수어통역사가 다역을 맡아야 한다. 연습 내내 각각의 캐릭터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집요하게 연구해 말투, 행동, 표정을 변화시킨다. 청각장애인이 빠르게 화자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지금 어떤 인물을 통역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전달한다.

예를 들어 한 수어통역사가 청년과 노인 캐릭터를 모두 통역해야 할 땐 노인은 느리게, 청년은 빠르게 수어를 한다. 표정 연구도 도움이 된다. 김씨는 “예전에 배우들이 탈을 쓰고 나오는 연극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역할을 모두 통역했었다”며 “ 캐릭터 구분을 위해 거울을 보며 각자 쓰고 있는 탈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하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더 많은 울림을 전하기 위해

두 수어통역사는 “작업을 할 때 서로 원하는 것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연출이 원하는 방향이 확고해 수어통역사들이 필요한 자리에 서지 못하거나 배우들이 수어통역으로 인해 연기에 집중이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김씨는 “수어통역사들에겐 항상 빛이 들어와야 해서 배리어프리 연극은 암전 연출이 어렵다”며 “배리어프리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던 땐 손전등으로 손만 비춘 채 수어통역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극단 관계자, 연출진, 저희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좋은 연극을 위한 주장을 한다”며 “수어통역사는 농인의 더 나은 문화 향유권을 위한 배리어프리 공연이 만들어지도록 의견을 피력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전 회차 배리어프리 공연이 당연하다고 말씀해 주시거나 저희 의견을 경청해 주시는 관계자나 연출진을 만나면 정말 감사하죠.”

배리어프리 공연 발전을 위해 두 수어통역사는 더 많은 공연이 배리어프리로 제작돼야 한다고 말한다. 최씨는 “지금 배리어프리 연극은 국공립 단체나 소규모 극단 위주다 보니 대중에겐 익숙지 않은 형태가 많다”며 “대중적인 공연이 배리어프리로 더 많이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청각장애인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공연 수를 늘리기 위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극 수요조사를 제안했다. 그는 “공연에 지인을 초대했을 때 이해가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며 “관객들이 기대했던 공연이 올라오면 엄청난 설렘을 느끼듯 청각장애인 관객도 공연을 선택해서 관람하는 기분을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인 친구들과 재밌는 연극을 감상하고 같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다양한 배리어프리 연극이 기획돼 저도 더 활발하게 제작에 참여하고 싶습니다.”(김씨)

 

◆배리어프리: 장애인들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ㆍ제도적 장벽을 제거하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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