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의 모습. <strong>백가은 기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의 모습. 백가은 기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돈이 없거나 법을 몰라 호소할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주는 곳이 있다. 바로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상담원)이다. 서울시 양천구에 위치한 상담원은 1999년 8월26일 개원해 사회적 약자에게 법률상담 및 조정화해, 대서, 소송구조 등 법률적 구조사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상담원을 설립해 24년째 운영하는 양정자 원장(법학·66년졸)을 만나봤다.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사무실에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양정자 원장. <strong>백가은 기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사무실에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양정자 원장. 백가은 기자

상담원은 건물의 두 층을 사용하고 있다. 양 원장은 상담원의 구조를 병원에 빗대어 설명했다. 설명에 따르면 4층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본원으로써 상담이 이루어지고, 2층은 사람들의 병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원으로써 법률 교육을 하는 곳이다. 그를 따라 들어간 본원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그중 매트리스와 장난감들로 채워진 놀이방이 눈에 띄었다. 가정폭력을 당해 앉아서 상담받기조차 힘든 여성들이나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부모가 상담받는 동안 머물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상담원 곳곳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상담원에 방문한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닿게 하려는 마음이 전해졌다.

양 원장은 본교 법학과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인 고(故) 이태영 학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학장은 대통령에게 승인 임명을 받아야 판사가 될 수 있던 당시, “국민이 여자 판사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판사 승인 임명을 받지 못하고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출범한 것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상담소)였다. 의과대학에는 실제로 환자를 대할 수 있는 클리닉 에듀케이션(실습 과정)이 있지만, 법과대학에는 현장에서 의뢰인을 만나볼 수 있는 교육과정이 없었다. 이 학장이 시작한 상담소에서 본교는 처음으로 법과대학만의 실습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인권 변호사를 꿈꿔온 양 원장은 실습 기간 동안 그곳에서 일하면서 “정말 이런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 학장은 당시 졸업을 앞둔 양 원장에게 동역자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평소 독립적인 삶을 강조한 이 학장이지만 이 제안을 할 때는 부모님께 허락받을 것을 요구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 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 같다”며 “네가 원하면 하라”고 말했다. 양 원장은 결국 이것이 그의 긴 여정의 결론이라고 설명했다. 양 원장은 상담소에서 33년간 동역자로 일하며 지부를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오는 순서대로 상담을 해주니까 서울에서만 상담하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상담을 못할 수도 있고, 돈도 없는데 여관에 서 자야 해요.” 그가 국내 외 46개 지역에 법조 공익시설을 창설한 이유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즉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생각 하나로 일을 계속했다.

양 원장이 55세가 되던 해 이 학장이 치매로 상담소를 떠났다. 새로 부임한 소장의 운영방식이 기존의 운영 철학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에 그는 상담소를 떠나 새로운 터를 잡았다. 별관 한 층을 무료로 지원해 준 홍익병원의 도움을 받아 상담원을 세웠다. 상담원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법도 모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관’이다. 그렇기에 모든 상담과 교육을 무료로 진행한다. 돈 한 푼 받지 않는 상담만을 해왔지만 그의 곁엔 늘 든든한 후원자들이 함께했다. 변호사 자원봉사자들도 있다. 이들은 개인 사무실에서는 돈을 벌고, 이곳에 와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소송을 진행한다. 덕분에 그는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대원칙을 굽히지 않고 흔들림 없이 상담원을 운영해 올 수 있었다.

한평생을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양 원장은 “천부에게서 받은 인권이 모두 존중되고, 성별이나 직위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약자들이 함께 경계선 안에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약자라는 이유로 그 경계선 밖에 나가있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것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꼭 돈 문제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는 57년간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삶을 위해 봉사해 왔다. 법률 개정 운동을 펼쳐 호주제 폐지를 이뤄냈고, 가정법원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국가정법원 설치 운동을 전개했다. 과거에 결혼을 통해 이주해 온 여성들은 이혼하면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남성들은 이를 빌미로 여성들을 인질 잡듯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상담을 통해 이런 현실을 마주한 그는 국적법 개정을 촉진해 문제 해결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상담하고 법을 고치기도 하면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 소외계층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데에 약간이라도 기여한 것이 보람차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다.“말로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국회의원 300명 중의 151명이 여자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죠. 아기가 아플 때도 항상 엄마들이 달려 가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지위는 낮고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그가 여성들에게 늘 반복해서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 내가 가장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 함부로 하게 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함부로 대해서도 안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잠을 안 자고 안 먹고 하지 말아라.” 그는 힘들어하는 상담자에게 “단세포 동물이 됐나 싶을 정도로 먼저 잘 먹고 잘 자는 데에 신경 쓰라”고 말한다. 남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재산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기에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을 돕고자 한다. 한 가지 다른 소망이 있다면 상담원 자체회관을 마련해 후배들이 집 걱정없이 안정된 환경 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가 없이 오랫동안 일하고 연금도 받지 못해 어렵게 지내는 이들이 많은데, 그들이 뜻을 모아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