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패싱(1929)

지난겨울, 모은 돈을 긁어모아 유럽으로 떠났다. 켜켜이 쌓인 매너리즘으로부터 잠깐이라도 좋으니 일단 도망칠 심산으로 여행을 준비하며 챙긴 단 한 권의 책이 넬라 라슨의 <패싱>이었다. 바삐 지내느라 사두고 읽지 못한 것 중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에서 때때로 움츠려야 했던 이유는 동양인 여성을 대하는 일부의 굴절된 관심과 선입견뿐이었다. 의미 모를 조롱도, 정체성을 넘겨짚는 자연스러운 무례함도, 경멸 어린 시선도 모두 포함한다. 비단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 그저 비아시아권을 경험한 수많은 동양인 여성의 내면에 가해져 온 폭력의 일각이다. 가끔은 비백인이자 여성이라는 차별의 교차로에 선 우리의 태생을 탓하며 자조하기도, ‘다음 생에 백인 남성으로 태어난다면~’ 과 같은 가시 섞인 농담에 나날이 진심이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 <패싱>은 그러한 사유를 다른 의미로 확장했다.

<패싱>에서는 ‘백인 행세’를 하는 흑인의 위태로우면서도 과감한 모습,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다른 흑인의 고뇌가 숨이 막힐 만큼이나 상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백인 행세’가 가능한 이유는 흑인 여성 주인공인 클레어 켄드리와 아이린 웨스트우드의 피부색이 여타 흑인들에 비해 밝은 편에 속해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종의 외형적 경계에 서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클레어 켄드리는 이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패싱(Passing. 작중에서는 ‘백인 행세하기’로 각주 처리)’을 한다.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데, 그 과정에서 흑인 아이가 태어날까 불안에 떨기도 한다. 아이린 웨스트우드는 클레어에 비해 적극적으로 ‘백인 행세’를 하진 않지만, 호텔 루프탑과 같은 근사한 장소에 방문할 때는 누군가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내쫓길까 늘 전전긍긍한다.

농담이라는 미명으로 인종적인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백인 남성과 그 발언에 인위적인 폭소를 터뜨리는 흑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사뭇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체성 일부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때때로 모르는 체해야 하는 잔혹한 묘사는 자신의 정체성이 ‘정상성’에 온전히 부합해 보이도록 위장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생활’이라 명명하는 현대 사회의 양상과도 닮았다. 우리 역시도 클레어와 함께 위험의 모서리 위에 올라서 있다.

‘패싱’은 차별과 전면적으로 투쟁하기보다 일단 차별할 수 있는 위치에 불안하게라도 올라서고자 하는 비주류 계층의 인간 본성을 투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패싱>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인종의 다양성을 위계적이고 불연속적으로 구분하는 인종주의의 낡은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 데 있다. 계층에서 벗어나고자 치는 발버둥으로서의 ‘패싱’은 차별적 관행을 오히려 공고히 할 수 있는 위태로운 미봉책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차별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보여 준다. ‘백인 행세’할 수 있는 비백인, 피부색이 어두운 백인. 그들의 세상에선 과연 누구까지 차별받아야 하고, 왜 차별받아야 하는가.

인종 배반적이라는 감상이 들 정도로 철저히 자신과 분리된 삶을 사는 클레어의 마음을 우리는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다. 생물학적 이유만으로 사회 구조가 켜켜이 쌓아 올린 모순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뇌와 닮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장애인과 성소수자의 욕망과 갈증 역시 그 속성을 부정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오직 그 속성을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로 찾아가는 것만이 해결 방법이 된다.

다시금 <패싱>의 마지막 장을 덮었던 서유럽으로 돌아가 본다. 그곳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천착하는 동양인 여성이 존재한다. 그는 저편에 있는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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