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를 연필 한 자루로 종이 위에 유쾌하게 풀어나가며 잔잔한 울림을 전하는 작가가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펀자이씨툰’을 연재하고 있는 엄유진(정보디자인·00년졸)씨다. 국제결혼, 육아, 부모님 이야기 등 가족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룬다.

엄씨가 이화동산에 올라간 자신의 캐릭터를 상상하며 그린 일러스트. 제공=엄유진씨

 

일상은 낙서가 되고, 낙서는 만화가 되어

“어렸을 때부터 말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편했어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제 성향이 그림의 세계에서는 독창적, 창의적이라고 여겨지니까 그림을 활용하면 즐겁게 소통하게 되더라고요.”

일러스트레이터인 엄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상 속 즐거운 순간을 사진과 그림으로 기록해 왔다. 육아를 시작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이 기록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다이어리에만 보관되던 엄씨의 일상은 육아휴직 후 쓰던 편지로 세상 밖에 나왔다.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의 고민을 함께 나누던 디자이너 친구와의 그림 편지를 SNS에 공유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육아에 대한 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 속 다양한 이야기를 품게 됐다. 이를 독립된 이야기로 꾸려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펀자이씨툰 기획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특성에 맞춰 10컷 남짓의 콘티를 짜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만화는 영국 유학 시절 만난 태국인 남편과의 국제결혼, 한국에 정착하고 아이를 낳으며 시작된 육아, 어머니의 알츠하이머를 마주한 가족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펀자이씨툰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15만 명의 인스타그램 구독자를 보유하게 됐다. ‘펀자이씨툰’은 ‘어디로 가세요 펀자이씨’, ‘외계에서 온 펀자이씨’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됐다. 

많은 구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펀자이씨툰 인스타그램 계정. 제공=엄유진씨
많은 구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펀자이씨툰 인스타그램 계정. 제공=엄유진씨

 

연필 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엔 가족

‘펀자이씨’라는 작가의 독특한 필명은 남편의 성인 ‘펀자이씨’에서 따온 이름이다. 엄씨는 “국제커플 카페에서 ‘펀자이씨의 펀펀펀’이라는 코믹한 신혼 일기를 쓸 때 쓰던 필명인데 소리가 특이해 호기심을 유발하는 점이 좋았다”며 “가족 이야기의 시작이 ‘펀자이씨’라는 이름과 함께 했으므로 이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펀자이씨툰’에는 소설가인 어머니와 철학자인 아버지, 엄씨의 오빠와 동생, 남편과 딸 짠이(애칭) 등 많은 가족이 등장한다. 그에게 만화를 본 가족들의 반응을 묻자 “가족들은 제 만화를 잘 보지 않는다”며 웃었다. “부모님이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네 관점이 따뜻하고 남다르다는 격려는 자주 해주시지만 ‘너에게 비친 엄마, 아빠의 모습이 흥미롭다’며 거리를 두려고 하시죠.” 엄씨는 “가족들의 따뜻한 말은 힘이 되고, 거리두기는 자유를 준다”고 말했다. 

만화를 통해 가족들의 여러 면면을 관찰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경험은 엄씨에게 매우 특별하다. 그는 “딸로서 엄마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되면서 부모님을 전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식 간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가족 간의 대화나 일화를 통해 만화 속에 스며든다. 가족을 소재로 인생의 고민들을 가볍지만 철학적으로 풀어내며 독자들에게 담담한 위로를 전한다. 

시간에 대한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를 다룬 펀자이씨툰의 한 에피소드. 제공=엄유진씨
시간에 대한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를 다룬 펀자이씨툰의 한 에피소드. 제공=엄유진씨

일상을 다수의 구독자와 공유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민도 있다. 엄씨에겐 국제결혼을 알리는 게 아이한테 훗날 불이익이 되지 않을까,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어머니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피해 왔지만 불현듯 이 편견들을 넘어선다면 멋진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제 만화가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잖아요. 국제결혼, 알츠하이머에 대한 편견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보자 다짐했죠.”

한편으로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엄씨는 “뭐든지 그리고 싶지만 실존 인물을 다루다 보니 조심스럽게 소재를 고른다”며 “이런 이유로 갈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 등 가족의 여러 모습을 자세하게 그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한 독자로부터 ‘작가님은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으셨겠지만’으로 시작되는 고민의 메시지를 받은 후엔 만화를 그리는 데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 “독자들이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면면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콤플렉스나 학창 시절 왕따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만화에 담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순간의 사랑을 담아 만화로 부치는 편지

“가족을 소재로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만 보여주지 말고 네가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린다고 약속하면 뭐든지 그려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림을 그리다가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말씀을 떠올리죠.”

가족에 대한 만화를 그리며 가족 간의 관계성에 대한 생각을 전보다 자주 한다는 엄씨는 “가족 역시 그 관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딸로서 혹은 엄마로서의 의무보다 서로가 그 관계를 좋아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 상담가였던 어머니는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헌신만을 강조하는 문화나, 집착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잡히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사회가 더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펀자이씨툰은 지금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라는 제목으로 엄씨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담담하게 인생을 대하는 모습을 연재하고 있다. 엄씨는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를 통해 가장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생로병사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말했다.

엄씨의 다음 꿈은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다. “제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원래 하고 싶었던 건 그림책이었어요. 만화를 연재한 뒤에 그림책 한 권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해 보고 싶어요.” 

‘짠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공기 중에 뜨끈한 파장이 일어나며 달콤한 에너지가 전해진다.’(‘외계에서 온 펀자이씨’ 중)

이 만화를 보는 독자도 이 같은 파장과 에너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만화를 통해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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