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성 천재 시인의 삶이 누군가의 손끝에서 다시 시작됐다. 1963년 30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0년마다 자살을 시도했던 실비아는 불과 8살에 미국 보스턴 헤럴드(Boston Herald)지에 시가 실릴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좋은 딸이자 아내, 엄마로서 살아야 했다. 여성 시인으로서 느낀 격정을 써 내려간 그녀의 시는 사후 퓰리처상을 받고 나서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사후 60년이 지나 그는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비로소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창작 뮤지컬 ‘실비아,살다’(2022)는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토대로 재창작한 ◆팩션(faction) 뮤지컬이다. 작품 속 외롭고 쓸쓸했던 실비아 곁에는 묘령의 여인 ‘빅토리아’가 새롭게 등장한다.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실비아에게 빅토리아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낸다.

‘실비아,살다’는 2022년 초연을 올려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드 대상 후보에도 올랐다. 2023년 재연으로 돌아온 ‘실비아,살다’는 16일(일)까지 대학로 TOM 2관에서 공연된다. 극장 근처의 한 카페에서 ‘실비아,살다’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조윤지(경제·07년 중퇴)씨와 작곡가 김승민(경제·11년졸)씨를 만났다.

 

창작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작곡가 김승민씨(왼쪽)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조윤지씨.  이승현 사진기자
창작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작곡가 김승민씨(왼쪽)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조윤지씨. 이승현 사진기자

 

뮤지컬 동아리에서 시작된 인연

조씨는 김씨를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고의 작곡가”라고 말했다. 조씨가 연출을 맡거나 배우로 출연한 작품의 음악은 대부분 김씨의 몫이다. 두 사람은 1인 연극 ‘윤지는 오늘도 자기 싫어한다’(2018), ‘43kg만큼의 상아’(2018) 등 10편이 넘는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17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온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다.

두 사람은 2006년 본교 뮤지컬 동아리 ‘이뮤(EMU)’에서 처음 만났다. 동아리 선후배라뮤지컬 ‘한여름 밤의 꿈’에서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저는 익살스러운 요정 ‘퍽’, 윤지는 요정들의 여왕 ‘티타니아’ 역을 맡았죠.” 김씨는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학교 공부보다 뮤지컬에 열정을 쏟으며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창작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작곡가 김승민씨(왼쪽)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조윤지씨. <strong> 이승현 사진기자
창작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작곡가 김승민씨(왼쪽)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조윤지씨. 이승현 사진기자

 배우로만 무대에 서던 조씨는 이뮤에서 처음으로 연출을 경험했다. 그는 2학년 재학 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연출을 공부하러 뉴욕으로 떠났다. 김씨는 학교에 다니며 행정고시를 준비했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바로 해야겠더라고요.” 김씨는 고시 공부를 그만두고 경연 프로그램 편곡부터 연극 음악 작업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작곡가로서 첫발을 뗐다. 이뮤에서의 경험은 조씨에게 세심한 연출 능력을, 김씨에게는 풍부한 작곡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실비아,살다'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탄생은 연출가 조씨의 과거 경험과 맞닿아있다. 조씨는 2018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나 같은 사람에겐 밥도 사치”라며 식사를 거르고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친구들의 헌신적인 도움 끝에 겨우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여성 시인 실비아의 인생은 그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육아와 내조, 생계까지 책임지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던 실비아의 공허한 모습과 본인이 겹쳐보였다. ‘맹렬한 야수’ 같은 실비아의 시에 마음을 뺏긴 그는 자신과 실비아의 삶을 엮은 작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씨는 힘든 시기를 거친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구상했고 ‘빅토리아’라는 가상의 인물이 탄생했다. 미래에서 온 실비아인 빅토리아의 입을 빌려 과거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고자 했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로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등장인물 실비아(왼쪽)과 빅토리아. 제공=공연제작소 작작
뮤지컬 '실비아,살다'의 등장인물 실비아(왼쪽)과 빅토리아. 제공=공연제작소 작작

본격적인 극 작업을 앞두고 김씨는 뮤지컬 넘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곡을 위해 김씨는 작품의 배경이 된 인물인 실비아와 조씨,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이 실제로 겪은 인생의 아픔을 어떻게 곡으로 표현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제가 써내려간 짧은 곡들이 두 사람의 긴 인생을 과장하거나 축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웠죠.”

그럴 때마다 조씨는 본인을 믿어보라며 큰 배의 선장처럼 김씨를 이끌었다. 김씨의 손에서 탄생한 음악들은 뮤지컬 속 인물들의 입체적인 감정 표현을 완성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첫 뮤지컬이기도 한 ‘실비아,살다’는 저마다의 아픔을 가진 관객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건넸다.

 

당신을 위한 목도리가 돼줄게요

두 사람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넘버는 ‘아빠, 이 개자식’이다. 외도를 들킨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억누른 사회적 시선들을 향한 실비아의 분노가 드러난다. 아프리카 풍의 음악과 역동적인 안무,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진 이색적인 무대는 희열을 자아낸다.

중요한 장면인 만큼 의견 충돌도 있었다. 조씨는 아프리카 부족의 음악으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김씨는 이질감이 든다며 주저했다. 조씨는 연출하면서 설계한 모습을 김씨에게 자세히 공유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안정적 음악을 추구하는 김씨와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조씨의 협업이 색다른 무대를 만들어냈다.

최근 두 사람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싱어롱데이’, 관객과의 대화 등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 작품을 사랑해주는 관객들과 폭넓게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기획이다.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돼 줄 거야.” 극 중 빅토리아는 실비아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실비아,살다’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목도리 같은 작품이 됐다. 한 관객이 조씨에게 다가와 “뮤지컬을 보고 지나간 아픔을 위로받았다”며 말을 건넨 것이다. “한때 죽고자 했던 내가 쓴 글이 정말로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목도리가 됐구나, 생각했어요.”

두 사람은 2024년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로 관객을 다시 만날 예정이다. ‘실비아’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빅토리아’처럼 앞으로도 함께하며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힘든 순간이 있을 때 그 끝에 빛이 있든 없든 일단 함께 가봐요. 그런 당신을 응원합니다.”

 

◆팩션(faction):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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