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여성, 농사. 어딘가 낯선 조합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인생을 보면 그 어색함과 거리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청년 여성이자 농부로서 농부들을 연결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 청년들을 모으는 두 사람 ‘논밭상점’의 박푸른들 대표와 ‘밭멍’의 김지현 대표를 만나봤다.

 

농부에 의한, 농부를 위한 ‘논밭상점’의 박푸른들 대표

부스에서 판매되고 있는 농밭상점의 농산물과 상품들. 제공=박푸른들씨
부스에서 판매되고 있는 농밭상점의 농산물과 상품들. 제공=박푸른들씨

진로 고민을 시작한 고등학생 무렵, 농사꾼들 사이에서 자라온 박씨는 언젠가부터 농부가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옆에서 지켜본 농부들의 삶은 고달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 일이 좋았고 자연스럽게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전공은 유기농업, 친환경 농사를 짓던 부모님을 따랐다.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인한 빚, 파산, 영농 포기의 악순환에 빠진 농부들을 돕고 외면받는 친환경 농작물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졸업 후엔 각종 농촌 운동에 뛰어들어 농부, 특히 여성 농부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힘썼다.

2018년 농촌의 작은 투사로 산 지 15년째 되던 어느 날 그는 논밭상점을 열었다. 농부들을 위한 합리적인 단가의 새로운 유통망이었다. 처음엔 판로가 막힌 아버지의 고구마만을 판매했지만 원하는 시기나 희망 가격에 출하하지 못해 판로가 막혔다는 농부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농사짓는 사람들을 위한 회사를 만들자”는 결심과 함께 출범한 논밭상점은 어느새 5년 차, 고정 인력 6명인 회사가 됐다. 20개가 넘는 농가들과 함께 허브와 같은 연중 재배 작물, 감자나 고구마 등의 계절 재배 작물을 판매 중이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계약(B2C)뿐 아니라 기업과 기업 간의 계약(B2B)까지 따내며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농사를 짓고 있는 박푸른들 대표. 제공=박푸른들씨
농사를 짓고 있는 박푸른들 대표. 제공=박푸른들씨

오로지 농부를 위한 농업과 유통에만 집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산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농부들이 직접 유통까지 하다 보니 소비자에게 농산물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특히 박씨는 한곳에서 자란 농산물도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콘텐츠도 제작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농업은 농부들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소비자들이 이해해줘야 가능하죠.”

농사와 작업 환경에 대한 생각도 많이 변했다. 10년 넘게 농촌 운동을 할 땐 몰랐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현장을 깊이 이해하게 되니 고민이 많아졌다. “농사뿐만 아니라 유통까지 직접 해보니 땀 흘려 키운 농산물이 식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무척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다양한 농촌 활동을 논밭상점의 이름으로 신중하게 시도하고 있습니다.”

논밭상점이 모두에게 따뜻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박씨에겐 농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소비자가 알아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건강한 소비를 위해 이곳에서 파는 농작물을 구입한다는 한 소비자의 댓글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농업 관련 혹은 환경친화적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 김씨는 “농업을 감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경험을 쌓으며 현실감각을 기른 후 정확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시작해야 지속 가능한 농업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재미없는 산골 마을을 청년들의 놀이터로, ‘밭멍’의 김지현 대표

밭멍 표지판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김지현 대표. 제공=김지현씨
밭멍 표지판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김지현 대표. 제공=김지현씨

강원도 태백산 아래 위치한 영월군 상동읍, 1000명도 살지 않는 폐광촌에 청년들이 모여 들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읍에서, 지속 가능한 농사를 추구하는 청년들의 농장’인 ‘밭멍’ 때문이다. 이곳의 대표 김지현씨는 2021년 자신의 고향인 상동읍에 밭멍을 만들어 농사를 하나의 문화로 만들고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힘쓰고 있다.

처음부터 이 마을을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대학 진학을 핑계 삼아 답답한 시골을 떠났다. 졸업 후 10년 넘게 직장인으로 살던 김씨는 201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과 농사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단지 ‘돕는 일’이라고 여겼던 배추 농사였지만 직접 가꾼 배추에 소비자들이 “김장 잘했다, 내년에도 또 구입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이자 큰 보람을 느끼게 됐다.

어떻게 하면 둘이서 더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무렵, ‘퍼머컬처’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퍼머컬처(permaculture)란 ‘지속가능한’(permanent)과 ‘농업’(agriculture)을 합친 단어다. 땅을 해치지 않고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농업을 지향한다. 화학비료 대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작물을 같이 심고 잡초를 뽑아 땅에 덮는 비닐 대신 사용한다. “쉽게 설명하면 농사할 때 제로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해가 지속될수록 농작물에 사람 손이 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노동력이 적게 드는 데다 환경친화적인 퍼머컬처에 매료된 김씨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낯선 퍼머컬처 보급과 교육을 위해 벤처를 만들었지만 퍼머컬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벤처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퍼머컬처를 실현하기 위한 농장 ‘밭멍’을 만들었다. “다들 도시에서 사업을 키워야 한다고 했지만 퍼머컬처를 하려면 자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퍼머컬처를 위한 농장을 디자인하기 위해 집과 밭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김씨는 평범하던 아버지의 밭을 나뭇잎 모양으로 만들었다. 기존 사각형의 밭은 사람이 다니는 길을 직선으로 만들기 때문에 전체 면적의 50%밖에 활용하지 못한다. 나뭇잎 모양의 밭은 사람이 다니는 길을 곡선으로 만들어 전체 면적의 70%가 넘는 공간에 농작물을 심을 수 있게 된다.

밭멍의 상징과도 같은 나뭇잎 모양의 밭. 제공=김지현 대표
밭멍의 상징과도 같은 나뭇잎 모양의 밭. 제공=김지현 대표

이렇게 농장을 일구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하나둘 모였다. 지금 밭멍은 ‘밭메이커’라고 불리는 4명이 넘는 활동가들과 ▲에어비앤비 ▲농촌 체험프로그램 ▲마을 커뮤니티 활성화 ▲제로웨이스팅 가드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작은 농촌 공동체가 됐다. “작년에 밭멍에 왔다 간 청년들이 서른 명이 넘는데, 이 중 한두 명만 남아줘도 마을이 젊어지고 더 활기차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씨는 새로 들어온 청년들이 마을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밭멍의 올해 목표는 ‘자급자족’이다. 동료들이 서울에서 돈을 잔뜩 쓰고 돌아오는 걸 본 김씨는 영월에도 ‘돈 쓸 곳’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 같이 모여 서로의 소비패턴을 파악한 뒤 이를 바탕으로 카페, 렌터카 사업 등의 밭멍 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김씨는 밭멍 공동체를 점점 확장해 나가다 보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남아서 이 마을을 가꾸고 아껴주면 이곳의 아이들이 자신의 고향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걸 몸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농촌에서 여성은 농업이 시작된 이래로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역동적인 농촌을 이끌고 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밭멍과 논밭상점을 위한 말이 아닐까. 여성 청년 농부들의 아이디어가 농촌 마을을 살리는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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