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에 삶의 철학을 담아내는 김혜정 도예가 박성빈 사진기자
도예에 삶의 철학을 담아내는 김혜정 도예가 박성빈 사진기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길 바라는 도예가가 있다. <고려味려: 추상하는 감각>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김혜정(도예·92년졸)씨는 온화한 미소로 기자를 반겼다. 김 작가는 ‘2022 올해의 공예상’의 주인공으로, 30년 넘게 흙을 만져온 베테랑 도예가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본교 조형예술학부 도자예술전공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올해의 공예상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한국 공예 발전에 기여한 창작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김 작가는 작품의 탁월한 심미적 가치와 함께 ◆로에베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선정 등의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올해의 공예상 창작부문에 선정됐다.

 

생명의 순환을 도예로 말하다

경복궁 담장 옆에 위치한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고려味려> 기획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고려시대 유물을 재해석한 여러 도예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많은 도자기 사이에서도 김 작가의 작품은 단연 눈에 띈다. 그의 그릇은 완벽한 원형이라기보다는 유연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어 자연의 잎사귀가 떠오른다. 짙은 회청색부터 연한 옥색까지 청자의 비색을 다채롭게 표현한 것도 특징이다.

김혜정 도예가가 그려낸 자연의 곡선을 닮은 회청색빛의 작품들. 박성빈 사진기자
김혜정 도예가가 그려낸 자연의 곡선을 닮은 회청색빛의 작품들. 박성빈 사진기자

김 작가는 “작품의 영감은 주로 자연에서 얻는다”고 말했다. 평소 자연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그는 도자예술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순환과 그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그는 “도예가 겉보기엔 물건(무기물)을 만드는 것 같지만 재료인 흙 속에는 본래 생명체의 일부였던 것이 있다”고 전했다. 동물이나 인간의 사체는 흙에 묻히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분해된 생명은 흙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흙을 빚는 도예는 그 자체로 생명 순환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에게 ‘죽어서도 산다’는 말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다. “고양이, 사람 전부 죽으면 분해돼서 흙에 남잖아요. 작업할 땐 내 손 안에 있는 이 흙이 한때는 살아 있던 생명체였다는 걸 느껴요.”

김 작가는 최근 원자력 문제처럼 인간 사회가 생명 순환의 틀을 벗어나는 상황을 보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더 강조하게 됐다. “자연에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고, 사람 손을 탄 인위적인 것에는 자연스러움이 필요해요.” 흙이라는 자연 재료로 만든 도자예술을 통해 사람들이 생명과 자연의 중요함을 깨닫길 바라는 그다.

 

하나의 도자기 뒤엔 수많은 실패작 있어

“도예는 단지 예술이라기보다는 자연 과학의 결정이에요.”

김 작가에 따르면 도자기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을 다루는 기술, 최적 습도와 재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재료인 흙이 자연의 원료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 어떤 흙이 있는지 알려면 지질학도 공부해야 하고, ◆소성이 일어나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학도 공부해야 해요.” 모든 학문은 결국 상호 연결돼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작업 중에도 그는 과학적인 태도로 임하고자 한다.

1층 전시장에 전시된 김혜정 도예가의 작품들. 박성빈 사진기자
1층 전시장에 전시된 김혜정 도예가의 작품들. 박성빈 사진기자

김 작가는 도예가 농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농부도 농사지으려는 식물 종에 대해 잘 알고, 씨를 뿌린 후엔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알고서 최선의 노력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비바람처럼 계획대로 안되는 시련은 감수해야 하죠.” 도예도 농사처럼 자연을 다루는 일이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는 작업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여러 차례 새롭게 시도하고 공부하면서 경험치를 쌓고자 노력한다.

“실패작이 나오는 걸 두려워하면 새로운 걸 만들 수 없어요. 사람들이 소위 ‘망했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될지를 다시 한번 고민하다 보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와요.”

 

도예는 내가 살아가는 법

“도예는 제 삶의 길이에요.”

김 작가에게 도예는 삶의 길이고, 살아가는 방향이자 시간이다. 대학 전공으로 시작한 도예는 이제 그에게 삶을 사는 방법 자체가 됐다. 그는 “전공을 계속하다 보니 도예가 ‘업(業)’이 됐다”며 “누가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도예를 계속하는 이유는 스스로 더 자유롭게 살고,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들고픈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업 중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찾는 재미도 있다.

<고려味려>는 ‘온지음 맛공방’과 도예가들이 연계해 고려시대 개성지역 음식을 재현하고, 각각의 요리를 어울리는 도예 작품에 담아 선보이는 독특한 전시다. 김 작가의 작품에도 고려 시대 음식이 담겼다. 어두운 흙에 청자유를 발라 제작한 회청색 반달 그릇에는 고려시대 순대 요리 ‘절창’이, 옥 같은 비색으로 반짝이는 청자 대발에는 곰탕이 담겼다. “전시 작품에 진짜 음식을 담은 걸 보니 너무 신기하고 행복해요.” 김작가는 작품이 실생활에서 활용될 때 도예가로서의 진정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작품이 전시되는 건 제게도 즐거운 예술의 향유지만 도자기는 쓰임이 있는 그릇이잖아요. 제가 만든 컵으로 커피 마시고 있다며 지인들에게 사진을 받을 때마다 너무 기쁩니다.”

자연의 순환에서 영감을 얻는 김혜정 도예가  박성빈 사진기자
자연의 순환에서 영감을 얻는 김혜정 도예가 박성빈 사진기자

 

◆로에베 공예상: 스페인 고급 패션 브랜드 로에베가 현대 공예의 예술성, 독창성을 기리고자 2016년부터 로에베 재단을 통해 제정한 국제적 권위의 상.

◆소성: 조합된 원료를 가열해 경화성 물질을 만드는 것. 쉽게 말해 광물류를 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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