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주 수의사는 본교에서 여성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키라'라는 이름으로 3년을 일했다. 활동가로 일하며 소통으로 인해 생기는 오해에 지쳐갔다. 수의사가 되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돌연 전북 정읍으로 내려가 동물병원을 열었다. 정읍 내장산 자락에서 7년째 동물병원을 운영 중인 그는 최근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냈다. 웃음 많고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그를 전화로 만났다.

 

허은주 수의사 제공=허은주 수의사
허은주 수의사 제공=허은주 수의사

 

 

슬픔과 함께 산다고 불행한 건 아니야.

슬픔을 살아내면서도 행복할 수 있어.

 -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중에서

 

생사와 가까운 직업이라 하면 흔히 의사를 떠올리지만, 수의사도 다르지 않다. 대상이 다를 뿐 동물병원에도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한다. 매일 수많은 삶과 죽음을 마주하는 그에게 어떻게 슬픔을 이겨내는지 묻자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오른다고 해서 그 감정을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주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떠난 동물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동물을 너무 사랑하면 수의사가 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동물이 아프거나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에 분노하는 일이 많아서다. 그러나 사랑하는 동물들이 건강해지고 보호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는 행복도 크다. 허 수의사는 “그런 의미에서 슬픈 일보다는 좋은 일이 훨씬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허은주 수의사의 두 반려견 제공=허은주 수의사
허은주 수의사의 두 반려견 제공=허은주 수의사

병원에서 매일같이 동물들을 만나는 그는 집에서도 앵무새 한 마리,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한다. 유황앵무 사랑이는 오래전 사고로 한쪽 날개를 잃었다. 힘든 수술과 회복 과정을 거쳤으니 이제는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지내자는 마음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사랑이의 자해 습관이다. 사랑이는 깃을 부리로 다듬다 낸 상처를 계속 자극해서 큰 상처를 만들곤 한다. 제 몸을 다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넥카라를 씌워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가 자해하는 습관까지 온전히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로 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대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다.

“오랫동안 사랑이를 변화시키고 싶었지만 나는 사랑이를 바꾸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라, 사랑이가 좋아서 함께 살기로 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그나마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인데 그것조차도 정말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중에서 

 

유황앵무 사랑이 제공=허은주 수의사
유황앵무 사랑이 제공=허은주 수의사

 

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자세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동물이 사람 때문에 죽는다. 그는 수의사로 일하면서 한국의 펫산업이 심각하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허 수의사의 동물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펫샵이 있다. 펫샵에서 태어난 동물 중에는 유전적 질환을 가진 동물들이 많다. 무릎 관절 안의 뼈가 원래 위치를 벗어나는 슬개골 탈구가 대표적이다. 펫샵의 목표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형의 동물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유전 질환 문제는 계속된다. 그는 “끊임없이 보호자에게 슬개골 탈구가 있다고 말하고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까를 생각하면 답답하다”고 전했다.

이런 그에게도 특별한 과거가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기 전에는 대학에서 여학생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여학생위원회나 여성운동 활동 자체가 즐거웠다”며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활동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허 수의사가 고등학교 때까지 막연히 느꼈던 불합리함과 부당함은 대학교 1학년 여성학 수업을 듣고 나서 해소됐다. 그 혼자만의 고민과 답답함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여성학을 공부하게 됐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지쳐 수의사를 선택했지만 여성에서 동물로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확대됐을 뿐이지 하는 일의 결은 비슷하다.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동물복지까지 이어졌다. 정읍에서도 허 수의사는 소싸움 반대 1인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다른 생명들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소들을 보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성 운동과 소싸움 반대 시위 모두 ‘당연한 것’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머지않아 수의사로서 야생조류 충돌을 막기 위한 정읍시 조례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허 수의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은 행복과 즐거움이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사랑이와 산책을 나갈 거라고 웃으며 말했던 그는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을 매일 찾아가고 있다. 

 

사랑이와 허은주 수의사 제공=허은주 수의사
사랑이와 허은주 수의사 제공=허은주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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