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계를 꿈꾸는 취재원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strong>제공=취재원
새로운 관계를 꿈꾸는 취재원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제공=취재원

가족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 2인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모든 가족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 사회에는 1인 가구, 비혼 공동체, 비혼 커플 등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태어나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서로를 가족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본지는 5월 가정의 달을 기념하며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꿈꾸는 5명의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다운 삶을 위해 함께 걸을 사람이 필요했다

“비혼 공동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제 ‘미래’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공간이자 내가 주체적으로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는 공간이요.”

비혼을 결심한 6명의 여성으로 이뤄진 공동체를 ‘미래’로 칭하는 이는 이예은(27∙여∙ 서울 성북구)씨다. 이씨가 속한 비혼 공동체에는 대학생, 대학원생, 취준생, 직장인 등 나이도 신분도 다른 사람들이 속해 있다. 먼 미래에 이들은 가까운 지역에 모여 살며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씨는 졸업 후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으로 구성된 교내 동아리 구성원들과 스터디를 하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현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내세우며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40~50대예요.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했고 저는 당장 졸업 후에 페미니스트로서 미래를 함께 걸어갈 사람이 필요했어요. 아직 준비된 건 없지만 (동아리 구성원들과) 먼 미래에 다시 만나는 대신 지금 당장 공동체를 이뤄보자고 이야기하게 됐죠.”

6명 모두가 함께 모이는 공통 모임은 한 달에 2번. 미래를 약속한 이들은 서로의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기 위해 매번 실험적인 활동을 하곤 한다. 첫 모임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지으면 농작물을 주기적으로 관리해야 하니까 자주 모일 수 있고 수확의 기쁨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후 모임에서는 함께 살기 위해 주거 정책을 알아보기도 했다.

이씨는 비혼 공동체 덕분에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고 말했다. “기존의 혈연 가족은 가족 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구성원이 희생하기를 바라는 분위기였어요. 그게 저한테는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비혼 공동체에서 각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며 심적으로 자유로워졌어요.”

 

낡은 가족제도, 우리도 보호받는 공동체이고 싶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가족제도 아래에서 이들은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건강가족기본법 제3조에 따르면 가족은 ‘혼인∙혈연∙ 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를 의미한다. 혼인, 혈연, 입양이 부재한 관계는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닌 이상 함께 주거 공동체를 이루기가 너무 어려운 거죠.”

소수의 형태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로 인해 이씨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비혼 공동체 속 여건이 되는 2~3명의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수억 원에 달하는 집을 구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법률혼 관계 중심으로 설계된 주택 정책에서 이들은 혜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혼 공동체의 형태로 제도권에 입성하기 위해 성인입양이라는 제도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친부모가 있는 성인을 입양할 경우 혈연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비혼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성인임에도 혈연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꾸리기 어려운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도적 한계가 새로운 관계를 향한 소망이 무너진 사례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퀴어 커플로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직장인 ㄱ씨(컴공∙21년졸)는 “2~3년 안에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아파트를 알아봤더니 전세대출 금리가 3.5%였다”며 “신혼부부 대상 전세대출 금리가 1%대인 걸 볼 때면 소위 ‘현타’가 오곤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ㄱ씨는 위급상황에서 여자친구가 보호자가 될 수 없는 현실도 불안하다고 말했다. “제가 선천적으로 장기 기형 질환이 있어서 위급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위급상황에서 여자친구는 보호자가 될 수 없으니까 저는 부모님이 지방에서 올라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거죠.”

14명의 비혼 메이트와 비혼 공동체를 계획하는 정지현(31∙여∙경기도 의정부시)씨는 “현재 가족제도가 실재하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못 본 척하는 것 같다”며 “이로 인해 다양한 삶의 형태가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가족의 의미 재고해볼 시점

가족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이라는 문제도 있다. 10년째 연애 중인 배민애(44∙여∙서울 강동구)씨와 그의 남자친구는 비혼 커플이다. 배씨는 “결혼을 한다고 지금보다 더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며 “처음부터 비혼을 약속하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 대화를 통해 조율해가며 지금의 관계에 이르게 됐다”고 답했다.

배씨는 남자친구와 함께 동거를 준비 중이다. 10년의 연애 과정에서 결혼 대신 비혼 동거를 택했다. 그는 “앞으로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며 새로운 관계를 이어가 보고 싶었다”며 동거를 결심한 계기를 설명했다. 배씨는 “같이 살 계획을 세우고는 있지만 동거하며 덜 행복하다고 느껴지면 언제든 따로 살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성연애의 결말은 결혼이라는 사회의 틀을 깨고 서로의 감정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씨는 혼자 사는 여자는 외롭다는 사회적 편견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요가, 달리기, 그림 그리기, 독서 모임 등 수많은 취미를 가진 배씨. 그는 한국어 강사로 일하며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피크닉을 가기도 한다. 배씨는 “생활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채워나가면서 살고 있다”며 “혼자 살아도 주위 사람들과 일상을 나눌 방법은 많다”고 말했다.

배씨는 가족이 선택의 영역에 놓여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의 감정을 마음으로 나눌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미래까지 같이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라 생각해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족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서로 동의하면 가족이 될 수 있는 거죠.”

십년지기 친구와 함께 사는 김주영(환경 공학전공 석사과정)씨는 가족에 대해 더 많 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각방을 쓰는 부부는 사이가 안 좋고,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게 이상하다”며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가족제도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로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2021년 4월27일 여성가족부는 ‘제4차 건강가정기본 계획’에서 변화하는 가족 개념에 맞춰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8월12일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은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위한 국회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2014년 발의를 추진했다 무산됐던 생활동반자법이 7년 만에 국회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이어 2022년 4월13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생활동반자법을 통해 성소수자 기본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며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권고하기도 했다.

사회는 느린 걸음으로 변하고 있다. 그동안 제도 밖에 놓인 다양한 가족들은 오늘도 서로가 서로의 안전망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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