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작품 번역집에 이어, ‘한국 최초 여성 작가’ 김명순 작품집을 출간한 현채운 번역가 <strong>김혜원 사진기자
나혜석 작품 번역집에 이어, ‘한국 최초 여성 작가’ 김명순 작품집을 출간한 현채운 번역가 김혜원 사진기자

20세기 초 한국의 페미니즘을 이끌었던 ◆’신여성'들의 글이 한 학생에 의해 영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구시대적 여성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 '1호 신여성' 나혜석의 작품이, 2022년 4월에는 낮은 신분 출신 여성의 삶을 조명한 김명순의 작품이 국내 최초로 영문 번역됐다. 한국 페미니즘의 포문을 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앞장서서 번역하는 이는 누구일까. 본지는 번역가이자 본교 재학생인 현채운(국제·18)씨를 4월30일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학부 2학년 시절, 신여성 작가의 존재조차 모르던 현씨는 양지하 교수의(사학과) 수업을 계기로 나혜석을 알게 됐다.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까마득한 조선시대에 ‘여성 해방’을 외친 여성 작가의 날카로운 필력은 현씨에게 강렬한 울림을 줬다. 그날부로 현씨는 신여성 작가들의 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혜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기생의 딸로서 신분제도에 억눌린 여성들의 비애를 기록한 김명순에게도 빠져들었다. 그러나 100년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임에도 나혜석과 김명순은 그저 ‘나만 아는 작가’일 뿐이었다.

“'김명순' 이름 석 자를 대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한국 최초의 여성 작가라는 업적과 더불어 뛰어난 문학성, 시대를 한참 앞선 선진적 젠더 의식까지 갖추셨음에도 말이죠. 나혜석 역시 화가로는 알려졌어도 작가로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고 재조명하고자 번역을 결심했습니다.”

현채운씨가 번역한 나혜석, 김명순 작품집 <strong>김혜원 사진기자
현채운씨가 번역한 나혜석, 김명순 작품집 김혜원 사진기자

현씨는 2021년 나혜석의 작품 21편을 번역한 'Selected Works of Na Hye-seok, the Korean Pioneer of Women’s Liberation'을 출간하며 신여성 작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약 1년이 지난 2022년 4월에는 김명순의 작품 14편을 번역한 'Collected Works of the First Korean Female Writer Kim Myeong-sun'도 출간했다. 나혜석, 김명순의 작품에 대한 국내 최초 번역집이다.

번역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당시의 여성 차별적 사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나혜석의 수필 <모된 감상기>는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는 시대를 비판하고 있으며, 김명순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는 여성에 대한 정조 관념,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 가해자를 은연중에 옹호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씨는 “당시 철저히 타자화됐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치열한 고민을 21세기 독자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구조적 불평등이 어떻게 자리 잡게 된 것인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신여성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은 소설의 일반적인 번역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한글을 영어로 변환하기에 앞서 어휘와 문장 구조를 현대화하는 '해독 작업'을 거쳐야 한다. 대부분이 조선시대에 쓰인 고전 작품이기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한자어와 고어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고전 분위기 살리기' 작업이 필요하다. 현씨는 “고전 분위기 살리기는 한국어 고유의 느낌이나 한국 전통 사회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라며 ”원작의 옛 느낌을 살리기 위해 19, 20세기 고전 영어 문학에서 쓰인 표현을 사용하는 등의 방식을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번역 과정 자체가 복잡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현씨를 가장 애먹인 것은 단연 한자어였다. 한 단어에 많은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한자어의 특성상 깔끔한 번역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현씨는 “한자어가 담긴 문장을 영어로 표현하면 길이가 훨씬 길어지곤 했다”며 “가독성 있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작가의 고유한 느낌을 간직하게끔 번역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했다.

한자어가 아니더라도 한국 고전 작품은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투성이였다. 현씨는 그중 가장 번역하기 어려웠던 단어로 ‘어멈’을 꼽았다. 어멈은 어머니를 낮춰 이르는 말임과 동시에 남의 집안 살림을 돕는 부인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어멈은 때에 따라 ‘mother’를 뜻하기도, ‘housemaid’를 뜻하기도 했다. 결국 현씨는 두손 두발 든 채 단어를 음절 그대로 ‘Eo-meom’(mother or housemaid)이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갖은 어려움이 닥쳤지만 현씨는 신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번역하는 동안 같은 작품을 10번 이상 읽으며 재검토했고 신여성들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그들의 역사를 공부했다. 현씨는 “번역하는 동안 작가의 혼을 그대로 전수 받는 것 같았다”며 “그만큼 작가의 작품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지와 작가에 대한 애정이 번역에 있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공간을 초월해 신여성들과 교류하며 이들의 작품을 번역한 현씨는 아직 학부생이다. <디지털타임스> 이규화 논설실장은 사설 ‘`신중하게 거침없던` 근대 여성 나혜석’을 통해 “읽기도 어려운 1세기 전 근대어 원전을 찾아 370여 쪽에 달하는 번역서를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번역자가 이화여대 3학년 학생이라는 데 또 한 번 놀라게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씨는 학업과 번역을 어떻게 병행하냐는 질문에 “새벽까지 작업하는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이어 “학업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방학부터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바쁜 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번역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씨는 ‘성취감’과 ‘간절함’이 그 원동력이라 말했다.

“작업이 끝난 뒤 책이 나오면 소진한 에너지가 배가 돼서 돌아오는 것 같아요. 현대 사회에서 아직 주목받지 못한 작품을 제가 최초로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오는 성취감도 크고요. 또 그만큼 신여성의 글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힘들어도 끝까지 나아가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현씨는 신여성 작가들의 글을 번역해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번역가로서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을 받는 것이다.

“20세기 초 비주류 여성 작가들의 글을 번역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세워 역사 속에 묻혀있던 이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탐색하며 사회 인식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신여성: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 맨부커상(Man Booker Prize):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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