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느즈막' 첫번째 프로젝트 참여자들 <strong>김나은 사진기자
'당신의 느즈막' 첫번째 프로젝트 참여자들 김나은 사진기자

김윤순(76·여·서울 노원구)씨는 74세가 될 때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그간 배움의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김씨가 살아온 시대는 ‘밥 벌어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였을 뿐이다. 

1958년, 당시 12살이었던 김씨는 9살배기 동생과 함께 느지막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교에 나갈 수는 없었다. 

“학교에 입학만 시켜놨지, 나는 컸잖아요. 자랐으니까 일을 시킬 수 있잖아요.”

같은 학급 친구들이 칠판을 바라보고 있을 때 김씨는 밥을 짓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다 보면 9시 학교 수업 종이 울렸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도우며 살다가 크면 결혼하고. 시집오자마자 아기 낳고 키우면서 시동생 뒷바라지하다 보니까요, 살면서 못 배운 게 한이 됐어도 공부를 생각할 여가는 없었어요.” 

김씨가 한글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태어나 74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자식 삼 남매를 모두 출가시킨 후 상계종합사회복지관의 한글학교 프로그램에 우연히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얼떨결에 한글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2년.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김씨는 한글을 모른 채 흘려보낸 세월이 그저 아깝기만 하다.

 

‘당신의 느즈막’의 첫 프로젝트에 참여한 최세은씨, 조귀남씨, 강명주씨, 김윤순씨, 조한희씨(왼쪽부터). <strong>김나은 사진기자
‘당신의 느즈막’의 첫 프로젝트에 참여한 최세은씨, 조귀남씨, 강명주씨, 김윤순씨, 조한희씨(왼쪽부터). 김나은 사진기자

한글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씨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런 김씨의 곁에 꿈에 다가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나타났다. 뒤늦게 한글을 익히기 시작한 할머니들을 돕고자 발 벗고 나선 젊은이들, 본교 재학생 6명으로 구성된 예비 사회적기업 '당신의느즈막’(당느)이다. 

우리 사회엔 김씨처럼 한글을 배우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이 아직 존재한다. 가장 최근 실시된 2008년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70대 노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글을 전혀 읽고 쓰지 못하는 ‘완전 비문해자’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약 3배 이상 많다. 이 수치를 증명하듯 김씨가 다니는 한글학교 역시 학생  25명 전원이 여성이다. 김씨는 “글 모르는 사람은 나 하나인 줄만 알았는데 와서 보니 너무 많다”며 “우리 세대에 여자로 태어나면 다 그랬나 보다”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당느는 이렇듯 배움에 목마른 할머니들을 주목하고 있다. 갓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존재를 당신들의 글을 통해 알리겠다는 것이 당느의 목표다. 그 일념하에 두 곳의 복지관에서 4명의 할머니와 매주 글쓰기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상계종합사회복지관 한글학교에 다니는 김씨, 조귀남(88·여·서울 노원구)씨와는 수요일마다, 강북구세군종합사회복지관 이룸학교에 다니는 고은희(63·여·서울 강북구)씨, 이은미(78·여·서울 노원구)씨와는 유동적으로 만난다.

오전11시, 할머니와 재학생들 모두 작은 교실에 둥그렇게 둘러앉으면 비로소 세미나가 시작된다. 세미나는 보통 동화책을 함께 읽으며 진행한다. 강북구서 네 번째 세미나가 있던 2021년 8월30일, 금주의 동화책은 '마음의 집'이었다. 복지관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가볍게 주고받은 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마음의 집'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은 후에는 '나는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어두는 사람인가'를 주제로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외향적이고 활발한 고씨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야 공기 전환이 잘 된다”며 마음의 집도 환기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이씨 역시 공감하며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북구 네 번째 세미나 당시 이은미씨가 작성한 시 <strong>제공=당신의느즈막
강북구 네 번째 세미나 당시 이은미씨가 작성한 시 제공=당신의느즈막

‘조그마한 언덕 위에 아담하게/남향으로 집을 지어 놓고 넓은/창문 활짝 열어놓고 하늘 태양/구름 날아가는 새 편안한 마음으로/보고 싶다’ -이은미, ‘내 마음에 집’ 

세미나는 동화책 주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공유한 뒤 함께 글을 쓰고 발표하며 막을 내린다. 

'글쓰기' 세미나지만 재학생들은 할머니들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거나 틀린 부분을 고쳐주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들이 제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그들을 기다릴 뿐이다. 당느 대표 강명주(정외·17)씨는 “할머니들의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라며 “할머니들이 위축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끔 돕는 것이 글쓰기 세미나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언제나 자신의 글이 완성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젊은이들 덕분에 김씨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한글학교에서 한글 공부할 때는 받침이 틀리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작가로 만들어준 이 젊은 선생님들은 틀려도 괜찮으니 그냥 써보라고 얘기해 줘요. 그러니까 남 앞에서 못 쓰던 글이 진짜 써지더라고요. 이화여대 선생님들한테 너무 고맙죠.”

 

'당신의 느즈막' 굿즈 <strong>김나은 사진기자
'당신의 느즈막' 굿즈 김나은 사진기자

2021년 7월부터 5개월간의 활동 기간 동안 할머니들이 완성한 작품은 70편이 넘는다. 당느는 팝업스토어를 열고 작품 20편을 담은 엽서 책과 할머니들의 글귀를 새겨 넣은 연필 세트를 제작해 판매했다. 당느의 첫 프로젝트, 「시 쓰는 할머니 작가들의 책상 위, 연필 세트와 엽서 책」이다. 당느 부원 최세은(경영·19)씨는 이를 “할머니들의 글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라 표현했다. 이어 “직접 쓰신 창작물이 세상에 나오는 경험을 할머니들께 선물해 드리고 싶었다”며 “이번 경험을 통해 글 쓰는 데 재미와 자신감을 더 붙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텀블벅(tumblbug.com) 목표 후원액의 189%를 달성했으며 팝업스토어를 통해 약 40만 원 수익을 추가로 거뒀다. 당느 부원 조한희(기후·21)씨는 “학교와 아예 관련 없는 사람들도 매장에 들어와 구경하고 상품을 구매해 갔다”며 “잊혀졌던 할머니들의 존재를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이번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고 감회를 전했다.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 후 잠시 휴식 기간에 돌입한 당느는 이달 말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강씨는 “두 번째 프로젝트는 문해 학습자 여성노인의 생애구술사를 엮어 출판, 펀딩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문해 학습자 할머니들이 아직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희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아요. 그저 우리 사회에 느지막이 글을 배우는 분들이 참 많다는 사실이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가장 조용히 흘러가던 문해 학습자 할머니들의 글과 이야기에 집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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