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전혀 낯선 언어를 구사하며 종국엔 먼지로 흩어져 사라지는, ‘수키 증후군’에 대한 이야기

제9회 수림문학상 당선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집필한 최지영 소설가 제공=본인
제9회 수림문학상 당선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집필한 최지영 소설가. 제공=본인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는 총기 난사 테러에서 살아남은 후 모어인 영어를 상실하고 생경한 언어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됐다. 어느 날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발병 원인은 미상이고 치료 방법은 부재했다. 한 개인의 아픔과 절망이 세계의 불안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19p)

84C330-수키 증후군(Suki’s syndrome). 테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 사이 번지고 있는 감염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낯선 언어를 구사하게 되며 종국엔 먼지로 흩어져 사라진다. 질병 명칭에 떡하니 자리 잡은 수키, 이 병의 최초 발병자이자 테러에서 목숨 걸고 아이를 구해내 한때 세계의 영웅이었던 그녀는 결국 혐오의 온상이 된 채 행방불명된다. 모두가 먼지로 흩어졌을 거라 단정 짓는 와중, 수키가 살아있으리라 굳게 믿는 시오는 다큐멘터리 ‘먼지 인간, 수키들’을 제작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다. 

신선한 소재와 전개 방식으로 모든 심사위원이 추천한 작품, 제9회 수림문학상 당선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집필한 최지영(사회생활·07년졸)씨를 23일 ECC B215호에서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고대 히브리어같이 전혀 낯선 말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테러같이 위험한 순간에서 나는 나를 희생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꾸리게 될 것인가 상상하던 그때 두 이야기를 하나로 합치면 어떤 서사가 만들어질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최 작가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두 가지 상상을 더 해 만든 주인공 수키를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작중에선 모어인 영어를 잃어 미국 사회에서 배제되고, 한국에서는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수키를 ‘사회적으로 사망’한 인물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최 작가는 5년 전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하던 당시엔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수키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수키의 마음을 헤아리고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타국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나서였다. 최 작가는 태국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던 중 팬데믹을 맞이했다. 그는 “당시 곁에 가족도, 친구도, 국가도 없는 상황에서 모국인 한국에서조차 외국에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며 외면하는 현실에 큰 좌절감을 느꼈다”며 “그때 겪은 고립의 시간이 수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5년에 걸쳐 완성된 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9월24일 제9회 수림문학상에 당선됐다. 심사위원단은 “1000매 가까이 되는 작품 전체를 ‘수키 증후군’과 관련된 인터뷰와 기사만으로 채운 점이 놀라웠다”고 평가했다. 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달리 보면 ‘수키 라임즈 다큐멘터리’다. 실제 다큐멘터리 구성처럼 수키에 대한 각종 기사와 인터뷰 자료들이 화자인 시오의 서술을 대신하고, 뒷받침한다.

심사위원단은 이런 독특한 전개 방식을 칭찬하며 “인터뷰와 기사 사이에는 어떻게 기사를 접하게 됐는지, 혹은 인터뷰를 하게 됐는지 보조 설명도 없이 툭툭 문단이 나뉘고 서술되지만, 그것이 허술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의 행이나 연처럼 압축된 힘을 가졌다”는 평을 부록을 통해 남겼다. 

이에 대해 최 작가는 “서로 어긋나 있는 조각들이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조각보 같은 느낌을 살리고 싶어 콜라주 양식을 택했다”고 답했다. 이어 “수키에 대한 기사와 인터뷰 자료들은 각기 다른 날서 있는 조각들이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분명 하나로 통일되고 융화될 거라 믿고 밀고 나갔다.”고 전했다.

최 작가가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이 소설의 키워드에 관해 묻자 그는 ‘기억’이라 답했다. 소설의 제목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도 시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사라지는 수키 증후군 환자들을 기억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소설에 기억이란 단어가 과도할 정도로 많이 들어가 있어요. ‘수키 증후군 환자들을 기억해 주세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요. 그런데도 빼지 않고 남겨둔 이유는 사라져가는 수키 증후군 환자들의 기억해 달라는 절규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내 일이 아니더라도,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더라도 기억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잖아요. 독자분들도 지금 자신이 기억해야 할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설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최 작가에게는 소설이 잘 쓰이지 않는 시간마저 즐거운 고통이다. 그는 “쓰는 과정이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럽더라도 결국엔 그 고통이 결과물로 나오니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그래도 쓰는 고통이 너무 클 땐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재 최 작가는 태국의 나레수안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며 소설 쓰는 것을 병행하고 있다. 그에게 소설을 쓰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저는 제가 쓴 소설 인물들이 착한 인물이든 나쁜 인물이든 간에 아주 조금씩 제가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속 인물들도 저에게서 비롯돼 나왔기에 모두 저예요. 결국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은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인물한테서 그 답을 찾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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