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계급, 국적 교차하며 새로운 차별로… 정지영 소장이 말하는 인종 문제

편집자주|본교는 교육의 산실이기도 하지만 92곳의 연구기관을 보유한 연구 터이기도 하다. 이에 본지는 변화를 이끌고 현실을 포착하는 흥미로운 연구들을 소개하려 한다. 1626호에서는 아시아여성학센터를 이끄는 정지영 소장과 함께 ‘신-인종화 현상'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아시아여성학센터 정지영 소장. 김영원 사진기자 
아시아여성학센터 정지영 소장. 김영원 사진기자 

조예대와 음대 건물을 지나 좁은 오솔길을 걷다 보면 셔틀버스 표지판에도 적혀 있지 않은 건물이 하나 있다. ‘영학관’이라는 팻말 하나와 ‘아시아여성학센터’라는 문패 하나. 두 표지판만 달린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공간이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어디보다 원대하고 새롭다.

2021년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 순수학문연구형에 아시아여성학센터의 ‘인종과 젠더: 글로벌 한국의 신-인종화 현상 분석’ 연구가 신규과제로 선정됐다. 이를 계기로 본교 여성학과 교수이자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인 정지영 소장을 만났다.

 

신-인종화 현상, 한국 내 인종주의를 비추다

정 소장은 2018년 아시아여성학센터 13대 소장으로 부임해 현재까지 센터를 이끌고 있다. 너무 바빠 하루를 10분 단위로 쪼개 산다는 정 소장은 “이번 지원사업 선정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여성 관련 연구가 대형 연구 사업에 선정된 경우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교육부에 공고된 학술 지원사업 선정 목록에서 ‘젠더’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사업이 처음 시행된 2019년부터 현재까지 전체 178개 연구 중 이에 해당하는 것은 4개에 불과했다. 이처럼 학술지원에서 소외된 분야임에도 정 소장은 “여성의 문제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차이와 차별,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매개"라며 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성학은 차이와 차별에 민감해요.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서 답을 찾는 거죠. 특히 아시아여성학은 여성학 내 서구 중심성과 보편성을 비판하는 학문이에요.”

정 소장은 기존 여성학이 오랜 내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페미니즘에 인종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내부의 차이를 질문한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도 서구 사회 내부로부터 나온 논의”라며 “하지만 인종 문제는 백인과 흑인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구중심으로 재편된 세계 속에서 아시아 여성의 삶과 시선에 주목하는 것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라고 덧붙였다.

정 소장은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인종차별은 제국-식민 관계에서 이뤄진 인종차별보다 복잡하고 고도화되고 있다"며 이번 연구에서 ‘신-인종화 현상’을 다루게 된 것도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에서 미국이나 유럽 사람은 당연히 백인이라고 전제하는 때가 있다고 꼬집으며 “‘백인’이라도 강대국 출신의 백인일 때만 진짜 ‘백인’으로 인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인종은 피부색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젠더, 국적,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요인들이 교차하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차별의 방식이라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 소장은 아시아인이 해외에서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예민하지만, 다문화가정, 외국인 이주민 등에 대한 국내 인종차별 문제에는 둔감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라는 생각에 인종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2019년 기준 한국 거주 외국인 주민은 약 220만 명으로 총인구의 4.3%에 달한다. 이는 2018년 약 205만 명 대비 7.9%나 증가한 수치이다. “특정 국가나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중국 동포,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편견도 더욱 강해지고 있죠. 한국 사회도 이제 인종 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필요가 있어요.”

정 소장에 따르면 해외 거주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사건이 터졌을 때, 한국 사회의 반응에도 성 역할과 성 규범, 계급 등 인종 외 요소가 개입된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당시, 피해자가 성매매 여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와 가난하지만 건실하게 사는 어머니들이라고 얘기될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요. 아시아인이 겪은 차별에 분개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 한편에 성적인 문제에 대한 편견이 섞이면서 선택적인 분노가 표현되는 거죠.”

정 소장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페미니즘의 논의구조에 개입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아시아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산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여성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서구/백인 중심성을 벗어나자는 논의는 오랫동안 제기됐지만, 페미니즘 관련 학회조차도 여전히 백인 중심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서구에서 진행된 연구는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론’이 되지만, 비서구의 연구는 그 이론의 ‘사례’가 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에요.”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이뤄지는 아시아여성학의 논의가 전 세계 페미니즘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 논의는 인도 중심으로 이론화가 이뤄져서 전 세계에 파급력을 갖게 됐거든요. 우리도 그런 이론적 틀을 만들어 보려 하는 거죠!”

 

독보적 연구기관으로 발돋움할 아시아여성학센터의 미래

“전 세계에 아시아 연구소도 많고 여성학 관련된 센터도 많아요. 근데 이 두 영역을 한데 묶어서 이름으로 내건 연구소는 거의 없어요.”

정 소장은 아시아여성학센터가 가진 희소성을 살리며 연구 역량을 강화하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는 이번 과제 선정의 의미로 특히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참여시켜 그 성장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집단 연구를 통해 학생들을 연구자로 키우고 그렇게 육성된 인재들에 의해 본 연구가 풍성해지는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며 “연구자들이 모여 유의미한 지식을 생산하는 명실상부한 아시아여성학 연구의 터전으로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시아여성학센터는 1995년 설립 후 ‘아시아여성학'이라는 분야 발전에 일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쳐 왔다. 1995년 5월 국내 최초의 영문 여성학 학술지이자 ◆SSCI급 저널인 AJWS(Asian Journal of Women)를 창간해서 현재까지 지속해서 발간하고 있다. 2005년에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International Interdisciplinary Congress on Women)를 주관했으며, 같은 해 대만,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8개국 여성학 교과서를 출간했다. 또 ◆EGEP(Ewha Global Empowerment Program)를 통해 아시아 여성 활동가 교육 및 교류 사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교육사업의 결실로 2020년 3월부터 아시아여성학협동과정(석사학위과정)을 열고 주로 아시아지역 출신 국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2021년부터는 한국의 비가시화된 여성 인물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한 근현대 여성 문화예술인을 발굴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별히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분야든 처음 그 판에 뛰어들고, 어떤 의미에서든 새로운 일을 시작한 최초의 여성들이 있었겠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런 취지에서, 정 소장은 최초의 영화 편집인(김영희), 최초의 근대극 연출가(박노경)와 같이 어느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합당하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찾아내고 홍보하느라 한창 분주하다. 이 사업은 현재 <새 장을 열다: 문화 분야 여성 개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SNS 매체를 통해 홍보 중이며 12월에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외에도 해외의 주요 학회와 협력하여 신-인종화 연구 관련 국제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등 아시아여성학센터의 달력은 연구 일정들로 가득하다.

정 소장은 대학원 학과인 여성학과에 소속돼 있지만, 학부생에 대한 애정이 크다. “학부생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늘 고민한다"는 그는 “앞으로 영화 상영회, 강연회 등을 기획하려고 하니 학생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며 “여성학과는 모든 전공의 학부생을 위한 학과"라며 웃었다. 특히 그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아시아라는 세계 속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했을 때 어떤 것이 달라지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구문화가 지배적이어서 가끔 잊게 되지만 우리는 분명 아시아에 속한 일원이죠. 아시아라는 비서구 세계에 속한, 어떤 의미에서 주변인일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세상을 볼 때 어떤 것들이 달라질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 흑인 여성이 중심이 된 페미니즘. 기존의 미국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비판이 일면서 인종과 젠더, 계급의 차이를 인식해야 흑인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2021년 3월 16일 미국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샵에서 백인 남성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8명의 여성이 숨졌으며 피해자 중 4명이 한국계 여성으로 밝혀졌다.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 식민지 경험이 있는 사회나 국가가 그 영향이나 잔재(殘滓)에서 벗어나려는 입장. 또는 그러한 이론.

◆SSCI: 미국의 톰슨사이언티픽(Thomson Scientific)에서 제공하는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논문 인용지수로, ISI(the Institute for Scientific Information)에서 개발한 SCI(Science Citation Index)에 근거해 발효되고 있다.

◆세계여성학대회(International Interdisciplinary Congress on Women): 전 세계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 여성 정책 관련자들이 모이는 가장 큰 규모의 여성학 관련 국제 학술 대회. 1981년에 이스라엘에서 제1회 대회가 열렸으며, 이후로 3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있다.

◆EGEP(Ewha Global Empowerment Program): 본교 아시아여성학센터가 2012~2019년에  14회에 걸쳐 진행한 아시아-아프리카 비정부 공익부문 여성 활동가의 리더십 역량 강화 프로그램으로, 여성학 이론·실천·네트워킹을 통합하는 참가자주도형 단기 교육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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