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주 KBS 성평등센터장. KBS 내 모든 업무의 바탕에 성평등이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서씨와 센터의 역할이다. 김영원 사진기자
서영주 KBS 성평등센터장. KBS 내 모든 업무의 바탕에 성평등이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서씨와 센터의 역할이다. 김영원 사진기자

“아마 저만큼 다양한 직장을 다닌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공통점은 늘 여성 정책을 다뤄왔다는 점입니다.”

강원도청 여성정책 연구개발담당부터 교육인적자원부 여성교육정책과장,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정책개발실장, 강원도 여성가족연구원장까지. 다양한 여성 정책 관련 경력을 쌓아온 서영주(법학·86년졸) 동문이 7월1일  KBS 2대 성평등센터장에 임명됐다.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그를 9월14일 KBS 본관 성평등센터장실에서 만났다.

여성 정책 행정가와 연구가로서의 경험을 인정받은 서 센터장은 방송사라는 전혀 다른 일터의 보직을 맡게 됐다. 언론인 출신이 아닌 그에게 KBS 성평등센터장이라는 직위는 모험이었기에 스스로가 잘할 수 있을지 우려도 많았다. 부임 후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서 센터장은 성평등센터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KBS 사옥 앞 여의도공원에서 하염없이 걷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센터의 역할은 성평등이 KBS 내 모든 업무의 기저에 깔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서 센터장은 이를 ‘KBS 성평등 플랫폼’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KBS 성평등센터는 사장 직속 상설기구로, 2018년 10월 국내 방송사 최초로 설립된 성평등센터다. 이러한 특수성을 기반으로, 센터는 크게 네 가지 역할을 하며 사내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끼친다. 성평등 문화 조성에 관한 공적 책임의 이행, 임직원의 성인지 감수성 향상, 사내 성평등 조직 문화 확립, 사내 성폭력 예방과 사건 조사가 그 내용이다.

막중한 임무를 지닌 데에 반해 센터 규모는 작은 편으로, 총 6명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구성원의 직종은 다양하다. PD, 취재 기자, 촬영 기자, 아나운서가 한 명씩 있고 외부에서 온 인력이 서 센터장 포함 두 명이다.

“굉장히 좋은 조직이죠. 외부의 시각을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이 저 포함 두 명 있고, KBS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종들도 함께 있잖아요.”

서 센터장은 조직 구성의 균형성에 대해 설명하고 “조직은 작지만 영향력은 작지 않은 조직이 아닌가 싶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낯선 조직을 이끈다는 과감한 도전의 이면에는 그의 탄탄한 경력이 있었다. 수년간 중앙 및 지방정부에서 여성 정책을 연구개발해 온 서 센터장의 커리어는 학부생 시절 실습 과목 이수를 위해 찾은 상담소에서 시작됐다. 본교 4학년 때 <법률상담실습> 과목을 수강한 서 센터장은 한 학기 동안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다양한 가정폭력 피해자를 만났다. 당시 서 센터장의 지도 선생님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상담가의 길을 걷기를 권유했다. 서 센터장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얘기들이 진로를 결정하는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 같다”며 감사를 표했다.

“가정폭력 상담을 하면서 현장에서 느껴지는 여성 인권의 열악한 상황, 여성 운동의 필요성을 크게 깨닫게 됐어요.”

서 센터장은 1995년 춘천 성폭력상담소의 초대 소장을 맡으며 다시 한번 여성이 처한 취약한 현실을 마주했다. 아버지로부터 심각한 폭력을 당해, 마침내 직접 아버지를 살해한 고등학생 의뢰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서 센터장은 말했다. 의뢰인은 고통의 원인을 없애 가족을 구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남은 가족들의 차가운 외면이었다. 서 센터장은 의뢰인을 따라 법정과 구치소를 쫓아다녔던 기억이 현재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NGO에서 직접 여성 피해자를 만난 경험을 통해 그는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며 “지금까지 여성 정책 관련 일들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성 정책을 다뤄오며 느끼기에, 과거에 비해 여성 인권 문제의 어떤 점이 개선됐는지 묻자 서 센터장은 법적, 물적 인프라가 개선됐다고 답했다. 성폭력 특별법, 가정 특별법,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특별법 등이 제정되고 가족법과 호적법이 개정됐다. 또 여성을 위한 상담사도 늘어났으며, 여전히 부족하지만 보육 시설도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여성 정책을 위해 일한 선배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고 서 센터장은 강조했다. 그는 선배들처럼 후세대를 위한 발판을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후세대를 위한 노력은 선배들로부터 전해 받은 책무”라며 “후배들이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막중한 책임 의식을 지닌 그에게도 여성 정책을 담당하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떤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데, 매번 예산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지난한 설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 정책을 왜 실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과정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늘 최대 난관이었다. “국회에 가서 예산을 받을 땐, 언제나 오장육부를 다 빼놓고 간 다음 돌아와서는 그걸 씻어서 다시 집어넣는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러나 서 센터장은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가 NGO에서 일한 11년은 왜 여성 정책들이 필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피해자를 만나 심각성을 직접 확인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돕고 나서 그가 느낀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는 “그들과 함께해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며 “‘내 개인 돈이었으면 안 받고 말지’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현장에서 일하며 얻은 확신과 자신감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서 센터장은 지난 경력에서 느낀 바를 토대로 현재의 성평등센터장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센터가 방송 콘텐츠의 성차별 요소 유무를 살피고 성평등 정책과 콘텐츠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모니터링을 진행하는데, 최근 시청자 상담실을 모니터링하는 중 유의미한 점을 포착했다. 2020년에 시청자 상담실이 전달받은 성인지 감수성 관련 비평이 2019년 대비 3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서 센터장은 “수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며 “시청자의 눈높이가 높아졌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젠더 의식이 높아지는 시대 흐름에 따라 언론사도 변화해야 한다고 서 센터장은 강조했다. 그는 3일 개최된 ‘2021 저널리즘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이정연 한겨레 젠더데스크, 이슬기 서울신문 젠더연구소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젠더와 저널리즘’을 주제로 토의했다. 서 센터장은 언론사 내 성평등을 위한 조직끼리 “힘을 합쳐 선한 영향력을 널리 끼치고자 참가했다”며 “다른 언론사에도 선한 영향력이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서 센터장은 본교 후배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그는 학창시절 힘들 때 주위의 멘토에게 도움을 구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후배들이 선배들을 찾아주길 바랐다.

“여러분의 옆에 항상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세요. 대부분의 멘토는 그 손을 덥썩 잡아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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