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이화역사관
제공=이화역사관

이화의 거인, 이화의 큰 스승. 본교 제8대 총장 고(故) 김옥길 선생을 이르는 말이다. 국내 최초 여성학 신설부터 국제하기대학 개최까지, 이화에 헌신한 김옥길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삶을 돌아봤다. 김옥길 총장 재임시절 본교 기독교학과 교수였던 서광선 명예교수와 당시 학보사 학생기자로 활동한 이수안 교수(이화인문과학원)를 각각 서면으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김옥길 선생은 총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한 이웃으로 사람을 대하셨습니다. 참된 신앙심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큰 스승이었죠.” 서 교수는 김옥길 선생을 이렇게 회상했다.

서광선 명예교수. 제공=본인
서광선 명예교수. 제공=본인

 

역동적인 개혁으로 새로운 이화를 만들다

평안남도 출신인 김옥길 선생은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 후 이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 후 기독교학과 교수로 부임한 김옥길 선생은 1961년, 본교 제8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총장 임명 후 18년간 이화를 이끈 김옥길 선생은 도전적인 개혁을 통해 본교의 역동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임기 동안 3개의 단과대학과 교육대학원이 신설됐고 20개의 학과가 창설됐다. 학생 규모는 8천 명에서 만 명으로 늘었다.

학과들이 신설되며 학문의 다양성이 넓어진 시기였지만 여자대학이란 이유로 부정적인 시선도 받았다. 당시 기독교학과장이던 서 교수는 1973년 철학과가 도입됐던 시기, 주변에 야유 섞인 반응이 있었음을 전했다.

“여자대학에 무슨 철학과가 필요하냐며 주변 대학의 남자 교수들까지도 비아냥거렸어요. 하지만 이제 본교의 철학과는 인문대학의 중심이 됐죠.”

여성학이 교양으로 처음 본교에 도입된 시기 역시 김옥길 총장이 재임 중이던 1977년이다. 1976년, 서 교수와 여러 학문 분야의 교수들이 모여 여성학개강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한국 내 여성학 전문가가 없었던 탓에 교수들은 외국 대학의 여성학 자료를 수집했고 토론과 논문발표를 통해 1년간의 연구 기간을 거쳤다. 당시 여성학 교양 개설을 주도한 서 교수는 “학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며 “300명이 수강신청을 하는 바람에 학관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 여성학 강의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던 이 교수는 여성학이 신설됐던 당시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여성학이 처음 도입됐을 때 사회의식이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열광하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차별적 처우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선택받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저 새로운 과목이 하나 등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죠”

이 교수는 “성차별 문제를 학생들 스스로 자각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김옥길 선생님과 교수님들이 선구적으로 여성학을 체계적인 학문분야로 도입한 건 매우 시의적절했다”며 “이후 여성학의 사회적 영향력 행사에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여성학 교양 개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김옥길 총장은 여성학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7년, 기존 한국여성사연구소와 문리대학의 여성자원개발연구소를 통합해 한국여성연구소를 신설했다.

세계적인 대학으로의 발판 역시 김옥길 총장 재임 당시 마련됐다. 재미교포 학생들이 본교에 방문해 한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한국어를 배우는 ‘국제하기대학’이 1971년 시작됐다. 시작한 해, 지원한 학생이 겨우 다섯 명에 그치자 서 교수는 다음해에 다시 개설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옥길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

“이화가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거 잊으셨나요? 다섯 사람이면 그때보다 5배나 되는데 왜 망설이십니까?”

그렇게 시작한 국제하기대학은 현재 매년 약 300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국제하계대학의 모태가 됐다.

김옥길 선생은 지금의 호크마대와 비슷한 형식의 실험대학을 도입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2년 동안 교양 교육을 받고 3학년부터 전공 학과를 선택해서 졸업하는 제도였다”며 “과감한 실험이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제도에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대학별 고사에서 4지 선다형이던 객관식 문제를 주관식, 서술형으로 바꿨다. 수학 시험의 산출 과정까지 시험지에 서술하는 방식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개편으로 인해 수험생이 줄고 입학생의 질이 저하됐다는 아우성이 높아지자 결국 김옥길 총장 은퇴 후 원상복귀됐다.

 

소탈하지만 담대한 사랑으로 이화를 지키다

제공=이화역사관
제공=이화역사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속, 김옥길 선생은 담대한 모습으로 본교 학생들을 지켰다. 1972년 11월 유신헌법이 통과된 후 서울대 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 유신반대 시위 행렬이 일었다. 본교 학생들의 시위대 역시 정문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김옥길 선생은 바로 그 시위대 맨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최류탄이 터질지도 모르는 찰나였습니다. 그때 전경 대장 바로 앞에 김옥길 선생님이 특유의 망토 차림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대 앞 많은 가게들은 문을 연 채, 데모 광경을 지켜 보고, 학생들 앞에 선 김옥길 총장님이 전경 대장과 마주 서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죠.” 서 교수가 회상했다.

서 교수는 김옥길 선생의 행보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학생들을 폭력적인 전경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김옥길 선생이 학생들 편에서 유신 정권을 반대하고,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학생 시위대 행렬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김옥길 선생은 1973년 11월30일 교무위원회를 소집해 유신정권에 총장 이름으로 된 건의문을 제출했다. 건의문에는 ‘구류, 기소된 학생들의 조속한 석방 요구’,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실천에 옮길 것’, ‘학원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 및 사회비판의 자유 허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 교수는 “한국 종합대학교 총장 이름으로 된 유일무이한 건의문”이라며 “민주화 운동 속에서 대학과 학문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지성인의 면모였다”고 덧붙였다.

담대한 리더십으로 학교를 이끌면서도 본교 구성원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이 교수는 김옥길 선생을 ‘항상 교정에서 자주 뵐 수 있는 푸근한 선생님’으로 기억했다. 서 교수도 ‘총장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정이 있는 분‘이라 말했다.

1943년~1949년 본교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던 당시 김옥길 선생은 모든 기숙사생들의 이름을 외우는가하면, 연애와 진로 고민도 나누는 친근한 선생님으로 통했다.

냉면 잔치도 그의 소탈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김옥길 선생은 매년 학교 구성원들을 자택에 초대해 평양식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했다. 잔치를 베풀며 안팎으로 건의사항, 학생들의 고충을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옥길면옥’이라는 별칭을 지어 부르기도 했다.

”교수뿐만 아니라, 경비원, 미화원, 학생들까지 모두 초대해 냉면을 대접하셨습니다. 선생님 댁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어요. 동네 아이들도 선생님 댁 마당에 있는 샘물을 퍼 마시며 놀 정도였죠.” 서 교수가 말했다.

제공=이화역사관
제공=이화역사관

당시 김옥길 선생과 본지 학생 기자들과의 만찬에 기자로서 함께한 이 교수도 냉면 잔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매년 신년인사 겸 학보사 기자들과 냉면을 먹으며 격려와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비판적인 기사를 쓰지 말라는 말씀은 한 번도 하시지 않았고, 항상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주셨죠.” 이 교수가 말했다.

한편, 김옥길 선생은 18년간 임기를 마친 후 1979년 본교 총장직을 내려놓았다. 퇴임 후에는 교육부의 전신인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또 1979년부터 본교 명예총장, 1986년부터는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을 역임하며 본교를 위해 헌신했다. 충청북도 괴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0년 8월25일 별세했다.

서 교수와 이 교수는 김옥길 선생에 대해 과감한 행동력을 가진 리더였다고 입을 모았다. 서 교수는 “대학이 직면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주의깊게 관찰하고, 이에 부응하는 대학을 만들어가는 과감한 지도력을 발휘한 총장이었다”며 “코로나19 이후 변화하는 사회, 정치, 경제 등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 교수 역시 “당시와 지금의 대학이 처한 환경이 매우 다르지만 학생들과 더욱 긴밀한 소통이 이뤄졌던 김옥길 선생님의 교육자적 태도를 갖춘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많은 참스승과 제자들의 관계가 이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