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최 위원장은 이 시대의 여성 청년들에게 기존의 역할과 틀을 깨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민경민 기자 minquaintmin@ewhain.net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최 위원장은 이 시대의 여성 청년들에게 기존의 역할과 틀을 깨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했다. 민경민 기자 minquaintmin@ewhain.net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기독∙74년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접견실로 들어왔다. 그는 인사 후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명함에 시선이 채 닿기도 전에 손에 울룩불룩한 것이 느껴졌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였다. 명함 위 점자는 그의 업을 짐작케 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지난 여름,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며 혐오에 맞서고 있는 최 위원장을 만났다.

 

현재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인권위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비정부 기구)가 아닌 국가 기구다. 일차적으로는 국가 권력(경찰, 검사, 지방자치단체의 국립병원 등)에 의한 인권 침해를 예방하고, 그것을 권고해 지양하게 만든다. 또 한 가지는 UN과 우리나라 헌법에도 있듯 ‘인간 평등에 대한 차별이 없도록’ 정책을 집행하고 발전시키는 기구다.

 

인권위가 촉구하는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은 어떤 법인가

‘평등법’은 우리 헌법에서 선언하고 있는 평등권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법률이다. ‘차별이 무엇인지’, ‘법에 따라 금지되는 차별행위는 무엇인지’에 관해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만약 차별이 발생하면 구제받는 방법, 차별의 예방과 시정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8월2일 국회에서 “지금이 평등법의 이름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그리고 똑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했다.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권위가 2006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이후 여러 차례 법안이 발의됐지만 법률이 제정되진 못했다. 국제사회도 우리에게 평등법 제정을 지속해서 촉구했다. OECD 회원국(2019년 기준) 중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에 이미 평등법이 있다. 또한 코로나19 상황이 차별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 인권위 조사 결과 국민의 88.5%가 평등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등법 제정은 시대의 요구이며, 여러 요건을 볼 때 지금이 적기라 생각한다.

 

평등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평등’은 어떤 이의 권리를 다른 이에게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함께 올라오는 것이다. 평등법 슬로건에도 있듯 “모두를 위한 평등”인 것이다. 여성이 남성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차별이 있었고, 그것을 깨며 왔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장치들이 여전히 많다. 지금 다 돼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현실을 다시 봐야 한다. 많은 기업과 공공기관 간부의 성비는 여전히 불균형하고, 여성이 요직에 앉더라도 역할은 제한돼 있다. 즉, 우리 사회 곳곳에 극복해야 할 불평등이 상존한다는 의미다.

 

일부는 평등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 중 ‘참정권 행사 및 행정절차서비스 이용 조항’이 외국인에게 참정권과 투표권을 부여한다며 우려를 내비친다

인권위 법도 평등법안도 차별 사유와 영역을 규정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에 관해 논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장애인이 투표소의 턱이 높아 투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참정권이 없는 외국인을 이곳으로 불러 투표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여성인권을지원하는사람들 대표 등 다양한 인권 활동을 했다. 어떤 계기로 인권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

부모의 영향 덕분이다. 아버지가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분이셨다. “너는 여자애가.”라는 표현을 가정에서 들어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대학에서 처음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걸 경험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여성은 조신해야 했고, 컵을 서빙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놀고 있네.” 그때 느낀 점이다. (웃음)

왜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결혼 후 미국에서 인종차별, 장애인차별 등 모든 것에 눈을 떴다. 그곳에선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놀라웠다. 한국에선 임산부가 밖에 다니는 것이 부끄럽다는 인식이 있던 때였다. 그렇게 인권에 관심을 가졌고 여성학을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여성학을 배우며 마음에 가졌던 모든 질문이 이 안에서 던져지는데, 세상에.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성폭력이라는 개념도 만들고 용어도 만들어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전부 의미 있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성폭력상담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성폭력상담소를 열 때 사회적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성폭력 당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개소 첫날 전화가 폭주했다. 전화를 못 받을 정도로 매일 200~300통씩 쏟아졌다. 피해 내용은 10년, 20년, 심지어는 30년 전에 일어난 것들이었다. 그때 전화를 받으며 함께 분노하고, 어떨 때는 “다른 전화가 왔으니 이따가 다시 전화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하고 끊은 후 펑펑 울기도 했었다. 성폭력 문제를 사회의 수면 위로 끌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국가인권위원장,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동기나 열망이 더 컸다. 인터뷰하면 항상 어려운 점을 얘기하라고 하는데 어려운 게 없었던 거 같다. (웃음)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만들어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 외에는 기쁨이었고 즐거움, 보람이었다.

스스로 ‘장’, ‘대표’를 맡겠다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도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다 보니 늘 앞에 서는 일을 하게 됐지만 다시 실무에 뛰어든 때도 있었다. 어떤 이는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아랫사람이 곤란하지 않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어야 하는 거다. 나는 다시 돌아간 느낌도 아니었고, 그저 내 일을 계속할 뿐이다.

 

임기까지 약 1년 정도 남았다. 꼭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평등법을 꼭 제정하고 싶다. 제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혐오 차별에 대한 범정부 선언을 하고, 지자체와 정부에 인권 시스템이 만들어지도록 기반을 다져야 한다. 말하자면 인권의 혈관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요즘 시대의 여성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코로나19가 여성과 청년의 사회 진출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악화돼 정부도 그 부분에 초집중하다 보니, 여성 청년의 사회 진출을 장려하는 것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 안타깝다. 내가 늘 해온 건 틀을 바꾸는 것이었던 것 같다. 여성 청년은 주체적으로 기존의 틀을 깨고 창의적인 것을 해야 한다.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운동은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고, 이 사회의 모든 인권은 함께 가야 한다. 사회 안에 자신이 속해있음을 깨닫고, 그 안에서 역할과 틀을 바꿔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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